급격한 몸 불리기 ‘돈 맥경화’ 불렀나
▲ M&A를 통해 급격히 사세를 확장한 STX그룹에 대한 유동성 위기설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강덕수 STX그룹 회장. | ||
지난 8월 26일 신라호텔에서 열린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초청 경제 4단체장 오찬 이후 ‘유동성 위기설’을 묻는 기자들에게 강덕수 STX그룹 회장이 던진 말이다. 기업 인수·합병(M&A)을 통해 급격히 몸을 불려온 STX에 대해 최근 들어 심각한 자금 유동성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지난 상반기 사상 최고 매출액 달성을 토대로 강 회장이 직접 진화에 나섰지만 증권가에 만연한 STX 관련 ‘설’의 그림자는 좀처럼 걷힐 줄 모르고 있다. “잘나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STX를 향한 비관론이 점점 확산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STX의 전신은 쌍용중공업이다. 지난 2000년 쌍용그룹이 해체되면서 한누리컨소시엄에 인수된 쌍용중공업을 당시 대표이사였던 강덕수 회장이 인수, STX로 사명을 바꾸고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이후 STX는 M&A계 큰손으로 거듭난다. 2001년 대동조선(현 STX조선) 인수를 시작으로 2002년 구미·반월공단 열병합발전소, 2004년 범양상선(현 STX팬오션) 등을 인수하며 단숨에 재계 20위권으로 뛰어올랐다. 최근엔 세계 최대 크루즈 업체 아커야즈를 인수해 업계 글로벌 강자 반열에 오르게 됐다.
STX와 관련한 괴소문의 범람은 비단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M&A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떠오른 STX를 향한 투자자들의 기대감은 점점 커진 반면 단기간 내 급성장을 이룬 STX를 향한 재계의 시선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일각에선 ‘망한 모 재벌의 쌈짓돈이 그룹의 뒷배’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올 들어 미국발 금융 위기와 유가 쇼크가 이어지며 주력인 조선·해운업이 국제경기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STX를 향한 위기설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증권가에선 STX 유동성 위기설 확전의 원인을 지난 8월 11일 미국 투자은행 메릴린치가 발표한 보고서 내용으로 보기도 한다. ‘계열사의 실적호조로 재무상태가 나쁘지 않지만 조선·해운업에 대한 비중이 지나치게 커 업황이 둔화될 경우 리스크가 크다’는 것이 보고서 내용의 골자다. 이런 부정적 평가 이후 일각에선 ‘STX가 인수한 해외업체 이사진과 갈등을 빚는다’는 미확인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위기설이 퍼지면서 STX 관련주는 일제히 하강곡선을 그려갔다.
유동성 논란에 대해 STX 측은 상당히 억울해 하는 분위기다. STX그룹은 지난 8월 18일 현금 유동성을 상세하게 공개해 의혹 진화에 나섰다. 공개된 내역에 따르면 그룹의 부채 총계는 3조 2000억 원. 현금 유동성 3조 원을 뺀 순차입금 규모는 2000억 원으로 총자산 23조 4000억 원의 0.85% 수준에 불과하다. 아울러 STX그룹은 올 상반기 매출 13조 원에 영업이익 9000억 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그러나 이 같은 진화 노력이 아직 제대로 약발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듯하다. 현금 유동성을 공개한 다음날인 8월 19일 지주사 격인 STX 주가는 4만 원 이하로 떨어졌다. 한때 10만 원대에 있기도 했던 주가가 4만 원 벽이 무너진 것은 지난해 5월 17일 이후 1년 3개월 만의 일이다. 강 회장이 직접 나선 8월 26일 이후에도 STX 주가는 큰 힘을 받지 못했다.
8월 27일 현재 STX 주가는 3만 3650원. 6월 초만 해도 8만 원대에 있던 것을 감안하면 투자자들 입장에선 ‘악’ 소리가 날 정도다. 실적 호황을 누리는 주력 계열사들 주가 상황도 별반 다를 바 없다. 6월 초 5만 6000원대에 있던 STX엔진은 2만 3100원, 2700원선이었던 STX팬오션은 1945원, 4만 원을 넘나들던 STX조선은 1만 9750원까지 곤두박질 친 상태다.
▲ STX그룹 본사 전경. | ||
일각에선 위기설이 나돌게 된 배경을 STX의 성장배경인 M&A 과정에서 찾고 있다. 대우건설에 이어 대한통운까지 인수, 재계 서열에서 라이벌 한진을 단숨에 제쳐버린 금호아시아나는 최근 대우건설 풋백옵션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전혀 문제없다’고 반박해도 ‘유동성 위기’의 꼬리표를 좀처럼 떼지 못하는 금호아시아나를 바라보는 재계 인사들이 STX에 대해서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이 STX 위기설을 부채질한다는 의견도 있다. STX는 한때 포스코 한화 GS 두산과 더불어 대우조선해양 인수 후보로 꼽혔지만 결국 인수의향서를 제출하지 않았다. M&A계 큰손으로 거듭난 STX가 사업적 연계성을 지닌 데다 성장 잠재력이 무궁무진한 대우조선해양 인수주체 후보군에서 스스로 내려왔다는 점은 유동성에 대한 의혹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지난 8월 25일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기자간담회에서 “대기업들이 과다한 외부 차입을 통해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나서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자금 동원력이 떨어지는 기업의 인수전 참여를 경계한 것으로 ‘유동성 위기설’ 꼬리표를 떼지 못하는 STX가 자연스레 주목받게 됐다. 그럼에도 재계는 STX를 여전히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 배제시키지 않고 있다. 인수대금이 최소 7조 원 이상이 될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서 STX는 국민연금관리공단 군인공제회와 더불어 인수후보에 힘을 실어줄 전략적 투자자감으로 꼽히고 있다.
재계의 이 같은 기대에 부응하듯 STX는 최근 유상증자를 실시해 실탄 장전을 도모했다. 그런데 뒷맛이 영 개운치 않게 됐다. 지난 6월 16일 공시를 통해 STX가 밝힌 유상증자 신주발행가액은 5만 7100원이었다. 그런데 7월 14일 공시를 통해 신주발행가액을 4만 1350원으로 변경했고 8월 12일엔 3만 7050원으로 낮춰 다시 공시했다.
6월 16일 당시 STX 주가는 6만 2600원이었으니 당시 신주발행가액 책정은 허무맹랑한 게 아니었지만 이후 주가가 4만 원 대 이하로 곤두박질치면서 발행가액 변경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5만 7100원에 신주를 발행할 수 있었더라면 총 539만 1225주를 유상증자하려던 STX는 3000억 원 이상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이은 신주발행가 변경으로 1000억 원가량이 줄어들어 자금 집행에 차질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한편 STX를 비롯해 금호아시아나 두산 등 지난 정권 때 M&A로 급성장한 대기업들 관련 구설수가 끊이지 않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몇몇 기업의 M&A 과정이 만에 하나 권력형 비리로 연결될 경우 노무현 정권 세력의 도덕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현 정권의 칼날이 언제 어떻게 이들에게 향해질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