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선 ‘북’ 날뛰고 안에선 ‘당’이 끓고
지난 4월 19일 오전 10시, 박근혜 대통령이 정부 과천청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열린 ‘과학기술인·정보통신인 한마음 대회’에 참석해 축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시각 서울 수유리 국립 4·19 민주묘지에서는 제53주년 4·19 혁명 기념식이 열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박 대통령 대신 정홍원 국무총리가 참석해 기념사를 했다. 4·19 혁명 기념식에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는 일은 흔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재임 중 단 한 차례, 지난 2010년에만 참석했다. 그해가 4·19 혁명 50주년이 되는 해여서 상대적으로 행사 규모가 컸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9일 과학기술·정보통신인 한마음대회에 참석했다. 같은 날 열린 4·19혁명 기념식 대신 이 자리에 참석한 것만 봐도 박 대통령이 과학기술 및 정보통신 분야에 대해 걸고 있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사진제공=청와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통령이 결국 과학기술인·정보통신인 한마음 대회 쪽으로 발길을 정한 것은 과학기술 및 정보통신(ICT) 분야에 대해 박 대통령이 걸고 있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과학기술과 ICT야말로 한국 경제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박 대통령이 제시한 ‘창조경제론’의 대표적인 추동력이다.
창조경제론을 빼고서는 박 대통령의 경제정책과 국정운영 비전을 설명할 수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수출산업 중심의 산업화를 통해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면 박 대통령은 창조경제론을 통해 한국 경제의 패러다임을 전환, ‘제2 한강의 기적’을 실현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그런 만큼 이날 행사 참석은 박 대통령의 절박함을 반영한다는 해석을 낳을 만했다.
최근 국내·외 환경과 앞으로의 전망 등을 종합할 때 박 대통령이 절박함을 느껴야 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새 정부 출범 초기 정부조직 개편안 처리 지연과 잇단 ‘인사 참사’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면서 그다지 조명을 받지 못했지만, 정부가 안정을 찾아감에 따라 보이지 않았던 난제들이 한꺼번에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다.
북한의 도발 위협으로 인한 한반도 위기, 우리 경제의 무역수지 악화로 직결되는 엔저 공세 등이 대표적으로 고민스런 외부 환경이다. 이들 중 하나만 더 악화돼도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구상을 통째로 헝클어버릴 수도 있다. 박근혜 정부가 그야말로 음울한 출범 2개월을 맞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환경적 악재 중 박 대통령에게 가장 골치 아픈 사안은 한반도 위기다. 사실 박 대통령은 남북관계에서 이명박 정부 5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야심차게 준비해 왔다. 북한의 도발에는 엄중하게 대응해야 하지만 모든 대화채널이 끊긴 채 남북관계가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등 전례 없는 최악의 충돌로 얼룩지게 내버려두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북한의 잇단 위협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가 ‘차분한 대응’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의지를 반영한다.
더욱이 통일부가 공식적으로 부인하긴 했지만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에는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단계적 접근법까지 포함돼 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했다. 3단계를 거치며 북한의 비핵화를 추진하되, 완벽한 비핵화는 3단계에서 이룬다는 게 골자다. 대화와 교류가 본격화되는 1단계에서부터 비핵화라는 거창한 조건을 내세울 경우 전임 이명박 정부가 걸었던 경로에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보수정부의 대북 정책으로 보기엔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향적 접근법이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감안하면 최근 한반도 위기는 박 대통령에겐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악재일 수 있다. 이전 정부에서의 남북·북미관계 경색의 연장선상에서 북한이 미사일 발사, 핵실험 등 도발에 나섰는데,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박근혜 정부가 입어야 할 처지이기 때문이다. 이미 개성공단 가동 중단 사태로 엄청난 피해가 현실화되고 있다.
더 큰 고민은 한반도 위기 상황이 해소되지 않을 경우 지금까지의 피해와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경제적 피해가 예상된다는 점이다. 국제 시장에서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발생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외국 자본이 대규모로 이탈하는 ‘셀 코리아’로 이어질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이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투자기업 관계자들, 상공회의소 관계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간담회를 가진 것은 이 같은 위기감을 반영한다. 이 자리에는 이례적으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과 주철기 외교안보수석도 배석했다.
장기 침체에 시달려 온 일본 정부가 엔저 공세의 고삐를 놓지 않고 있는 것도 박근혜 정부에 드리워진 암울한 먹구름이다. 수출 기업들 대부분이 일본 기업과 경쟁하는 산업구조를 갖고 있는 한국 경제에 이 같은 엔저 공세가 직격탄이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극우적 행태로 국제 사회에서 악동 취급을 받았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엔저를 핵심으로 한 ‘아베노믹스’를 통해 자국 내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다. 이는 G20(주요20개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가 엔저 공세를 이어갈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처럼 외부 환경만 불리한 게 아니다. 정권 초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른 시기에 불거지기 시작한 당·청 갈등, 민심 이반 징후 역시 박 대통령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사안이다. 새누리당 친박계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이른바 ‘개털론’이 제기될 정도로 청와대에 대한 여당 내부의 시선은 곱지 않다. 특히 정부 인사 과정에서의 소외감, 청와대에 대한 배신감 등은 끓어 터지기 직전 상태라는 게 여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한 새누리당 관계자는 최근 사석에서 “인사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청와대를 욕하고 다니는 일은 이전에도 흔히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욕하는 사람들의 급이 다르다는 게 문제”라고 우려를 표했다. 이 관계자는 “누가 봐도 VIP(박 대통령)의 최측근 그룹으로 알려진 원로조차 청와대에 인사 추천을 했다가 면박만 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다”며 “VIP를 보호하고 지지해줘야 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사태”라고 말했다.
또 다른 여권 인사는 “대통령이 윤진숙 해양수산부 장관을 임명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힌 뒤에도 새누리당 지도부에서조차 ‘윤진숙 불가’ 주장이 계속 제기됐던 것에 주목해야 한다”면서 “아직은 대통령과 청와대가 막강한 힘을 갖고 있을 때인데도 이런 정도니, 힘이라도 빠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고 걱정했다.
이 같은 안팎의 불리한 환경은 한국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겠다는 박 대통령의 구상에 큰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이 구상에는 창의적인 중소·중견기업들이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기업 생태계 조성, 대기업의 불공정행위 개혁, 지하경제 양성화 등 결코 쉽지 않은 개혁 과제들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당시 박 대통령의 핵심 공약들을 만드는 데 참여했던 한 여권 관계자는 “경제 상황이 악화되거나 대통령의 인기가 떨어질 경우 강력한 개혁 프로그램을 추진하기 위한 동력이 상실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대기업에도, 여당 의원들에게도 빚진 게 없는 박 대통령이야말로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뚫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적임자지만 환경이 받쳐주지 않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