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넘을 고개’ 더 있나
이건희 전 회장이 항소심 판결을 받은 것은 지난 10월 10일. 2008년 초 삼성특검 수사를 통해 경영권 불법승계,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 전 회장은 항소심 선고 2개월 내 상고심 선고를 권하는 삼성특검법에 따라 12월 10일 안에 대법원 판결을 받을 것으로 관측돼 왔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 전 회장에 대해 조세포탈 혐의만을 인정,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을 선고했다. 조준웅 특별검사는 이에 불복하고 상고했지만 이 전 회장과 이학수 전 부회장 등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삼성 인사들은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이 전 회장의 상고 포기가 ‘집행유예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므로 판결이 늦춰질 가능성은 낮아보였다. 이런 와중에 최종판결이 미뤄지다 보니 그 의미를 둘러싼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됐다.
우선 현재 진행 중인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발행 사건’에 시선이 쏠린다. 삼성특검 사건을 맡고 있는 대법원 1부(주심 김지형 대법관)와는 별개로 대법원 2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에버랜드 사건으로 기소된 허태학 박노빈 두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의 상고심을 심리 중이다. 이 전 회장 재판 과정에서 불법 경영권 승계 부분이 무죄 판결을 받은 만큼 1·2심에서 유죄를 받은 에버랜드 전·현직 사장들 판결에 대한 재판부의 고심이 깊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은 이 전 회장 사건과 에버랜드 건 재판 결과가 ‘이재용 전무로의 지분 승계과정에 불법은 없었다’는 방향으로 동시에 귀결될 것이란 관측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이 전 회장과 삼성에게 더없이 좋은 시나리오가 된다. 그러나 삼성 측이 그저 낙관만 하기엔 이른 면도 없지 않다. 이른바 ‘안기부 X파일 사건’ 변수를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회찬 전 민주노동당 의원은 2005년 8월 국회에서 “옛 안기부 불법 도청테이프에 전·현직 검사가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을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있다”고 폭로, 2007년 5월 통신비밀보호법위반과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기소된 상태다.
그런데 1월 중 열릴 이 사건 공판에 이학수 전 부회장이 증인으로 출석하게 됐다. 당초 증인으로 채택된 이 전 부회장은 네 번의 소환에 불응해오다 재판부가 강제구인장을 발부하자 오는 1월 19일 출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상태다. ‘떡값’ 공방은 자연스레 비자금 용처 논란과 연결될 수 있다. 2007년 말 김용철 변호사(전 삼성그룹 법무팀장)가 제기한 차명계좌·비자금 논란이 다시금 화제에 오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사정당국이 진행 중인 CJ 비자금 수사 역시 이 전 회장 대법원 판결에 앞서 논란거리가 될 여지가 있다. 전직 CJ그룹 자금관리팀장의 살인교사 사건 수사를 통해 범 삼성가 장손(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장남 이맹희 씨의 장남)인 이재현 회장이 그룹 전·현직 임직원 명의의 차명계좌로 이병철 창업주 상속재산 등 개인재산을 관리해온 정황이 드러난 상태다. 따라서 자칫 이병철 선대회장 유산 운용의 불똥이 튀지는 않을지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한편 이 전 회장은 지난 4월 22일 삼성쇄신안 발표를 통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는 선언을 하고 사원증까지 반납했지만 재계에선 여전히 이 전 회장의 경영행보에 주목하고 있다. 이 전 회장 퇴진과 전략기획실 해체로 구심점 공백을 맞은 삼성에 이 전 회장의 리더십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주장이 재계와 경제인단체 등에서 계속 제기되고 있다. 이를 위해선 대법원 판결이 이 전 회장의 발목을 잡지 않는 선에서 조기에 일단락돼야 한다.
이 전 회장의 삼성특검 재판 종결 여부는 이재용 전무의 거취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삼성 쇄신안 발표를 통해 해외근무를 통한 백의종군을 선언한 이 전무는 최근 중국법인 근무를 하면서 주말에 잠시 국내를 다녀가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 전 회장이 삼성특검 재판 굴레를 벗지 못하는 이상 이 전무의 국내복귀를 앞당기기 어려울 것이다.
이 전무는 이미 그룹 경영권 승계에 필요한 삼성에버랜드 지분 25.10%를 확보해 놓고 있다. 삼성특검 수사를 통해 이른바 ‘e삼성 사건’도 무혐의 처분을 받았고 이 전 회장 재판과정에서 지분승계 불법성 여부도 무혐의가 돼 승계 걸림돌은 사실상 사라진 상태다. 많은 재계 관계자들은 이 전 회장 재판이 원만하게 마무리되는 즉시 이재용 전무로의 경영권 승계작업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최근 몇몇 대기업 정보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삼성 직원들이 SK 인사들과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지난 광복절 특별사면을 받은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의 SK텔레콤 명예회장 추대 관련 정보 입수와 내용 분석에 많은 공을 들였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정보력을 자랑하는 삼성이 손길승 명예회장 컴백 같은 주요 사안을 심도 있게 다룬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관계자들은 ‘명예회장’이란 단어에 부쩍 신경을 기울이는 분위기다. 손길승 명예회장은 취임하면서 “경영에 간여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자문 역할에 충실할 것”이라 밝혔지만 한때 SK그룹을 쥐락펴락했던 손 명예회장의 컴백만으로도 그룹 내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는 전언이다. 마찬가지로 이건희 전 회장도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 경험을 그대로 버리지 않고 경영자문의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삼성뿐 아니라 재계를 위해서도 이 전 회장 경영 노하우를 살려야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닌지 모른다. 물론 이를 위해선 이 전 회장이 재판의 굴레에서 벗어나 특별사면 요건을 갖추는 것이 선결과제라는 점에서 대법원 판결 연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