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사자 키울 땐 ‘당근보다 채찍’
▲ 이명희 회장(왼쪽), 정용진 부회장(오른쪽) | ||
신세계와 더불어 국내 유통 3강으로 불리는 롯데그룹과 현대백화점그룹의 황태자들은 일찌감치 자사 지분율과 사내 위상에서 확고부동한 위치에 오른 상태다.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은 롯데그룹의 핵심인 롯데쇼핑 지분 14.59%를 보유하고 있으며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은 현대백화점 지분 17.33%를 갖고 있다.
두 사람은 각각 롯데쇼핑과 현대백화점의 최대주주에 올라있으며 경영일선 최선봉에 서 있다. 최근 신 부회장은 신격호 회장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룹의 제2롯데월드 사업과 M&A를 주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지선 회장도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이 2006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사실상 그룹의 총수역할을 수행해왔다.
반면 정용진 부회장은 신세계 지분 17.30%를 보유한 어머니 이명희 회장에 이어 7.32%를 보유, 신세계 2대주주에 올라있지만 신동빈 부회장이나 정지선 회장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이런 까닭에 정 부회장이 곧 수령하게 될 배당액을 지분 추가매집에 사용할지 관심을 모은다.
지난 1월 22일 신세계는 지난해 12월 31일 기준으로 주주들에게 주당 1250원을 지급하는 현금배당 결정 공시를 냈다. 정 부회장은 신세계 지분 7.32%(137만 9700주)를 갖고 있으므로 17억 2000만 원가량의 배당액을 받게 된다(세전 기준). 신세계보다 하루 앞선 1월 21일엔 계열사인 광주신세계가 주당 1250원의 현금배당 결정 공시를 냈다. 광주신세계 지분 52.08%(83만 3330주)를 보유한 정 부회장의 배당액은 10억 4000만 원 정도가 된다.
정 부회장의 신세계 지분율은 지난 2007년 3월 이후로 전혀 변화가 없다. 지난해 글로벌 경제위기 한파로 국내 증시가 걷잡을 수 없는 하향곡선을 그릴 때 재벌가 인사들이 앞 다퉈 자사 지분을 대량 매집했다. 낮은 가격에 지분율을 늘릴 수 있는 만큼 경영권 승계를 앞둔 황태자들의 지분 매집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그러나 신세계는 달랐다. 정 부회장은 단 1주의 주식도 사들이지 않은 반면 이명희 회장이 신세계 지분율을 대거 끌어올린 것이다. 이 회장은 지난해 7월 5만 6500주를 사들인 데 이어 10월과 11월 15만 3500주를 추가 매집, 지분율을 1.12%p 끌어올렸다. 지난해 하반기에 이 회장이 주식 매집에 사용한 금액이 총 937억 원에 이를 정도다.
훗날 정용진 부회장으로의 용이한 승계를 감안한다면 주가가 낮을 때 정 부회장 명의로 신세계 지분을 대량 매입하는 것이 증여세 부담을 덜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이 회장이 본인 명의 지분율만 늘린 까닭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일부 재계 관계자들은 ‘나중에 거액의 증여세를 부담할지언정 아직은 지분율에서 정 부회장에게 무게를 실어줄 때가 아니다’라고 이 회장이 판단했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일각에선 그 원인을 구학서 신세계 대표이사 부회장을 비롯한 전문경영진의 존재에서 찾기도 한다. 신동빈 부회장과 정지선 회장이 자사 경영을 진두지휘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신세계의 최근 사업 전면엔 구학서 대표이사 부회장을 위시한 전문경영진이 자리 잡고 있다. 신세계는 현재 전문경영진이 세부계획을 수립한 뒤 정 부회장과 상의하는 식으로 경영 전반의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것으로 알려진다.
신세계 법인등기부를 보더라도 정 부회장은 지난 2001년 3월 이후 등기이사진에서 빠진 상태다. 1년에 절반가량을 해외에서 보내는 이명희 회장도 2000년 3월 이후 등기이사진에서 이름을 내렸다. 구학서 부회장을 비롯해 석강 백화점부문 대표, 이경상 이마트부문 대표 등이 등기이사 명부를 채우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정 부회장의 그룹 내 위상이 정체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 사이 정 부회장 여동생 부부의 경영활동 폭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정유경 조선호텔 상무는 지난 1996년부터 조선호텔 등기이사진에 줄곧 포함돼 왔다.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이 경영권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신세계 계열분리를 통해 분가한 이명희 회장이 언론을 통해 “아버지(이병철 삼성 창업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언급하면서 이 회장이 딸에게 거는 기대 또한 주목을 받아왔다. 지난해 12월 인사를 통해 상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한 정 상무 남편 문성욱 신세계I&C 부사장도 초고속 승진으로 재계의 시선을 받고 있다.
지난 2006년 말 정용진 부회장은 부사장에서 두 계단이나 승진해 부회장직에 올라 경영권 승계 작업이 가속화될 것이라는 전망을 낳았지만 이후로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밖에서 볼 때 구학서 부회장 위세에 못 미치는 정 부회장을 두고 이명희 회장에 대해 아직은 ‘아들에 대한 힘 실어주기가 못미더울 것’이라는 평가와 더불어 ‘아기사자를 키우려 낭떠러지로 내모는 어미사자의 심정일 것’이란 관측이 따른다.
재계 일각에선 올해 들어 정 부회장이 도약할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지난해 말 구학서 부회장 최측근이 이주성 전 국세청장(구속) 비리 관련 수사당국의 조사를 받으면서 전문경영인 세력의 위축 조짐이 엿보인 까닭에서다. 신세계는 지난해 영업이익에서 유통 맞수 롯데쇼핑을 앞섰지만 매출에선 3년 만에 롯데쇼핑에 1위를 내주고 말았다. 최근 대형 M&A 등으로 주목받는 롯데와 비교될수록 그룹 살림을 쥐락펴락해온 전문경영진 책임론이 커질 수 있다는 점도 정 부회장 활동 폭 확대 전망으로 연결되곤 한다.
정 부회장의 향후 입지와 관련, 광주신세계의 위상 정립도 중요한 부분이다. 광주신세계는 정 부회장의 신세계 지분 매입을 위한 실탄창고가 될 것으로 평가받아왔다. 광주신세계 경영권을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 정 부회장이 지분을 모두 팔아도 수백억 원은 족히 손에 쥘 수 있는 까닭에서다.
그런데 경제개혁연대와 신세계 소액주주들은 정 부회장 등 신세계 전·현직 이사 다섯 명을 상대로 지난해 4월 189억 5000만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으며 현재까지 재판이 진행 중이다. 1998년 광주신세계 유상증자 과정에서 저가로 발행된 신주를 신세계가 인수하지 않아 회사와 주주들에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그룹 내 위상 재정립과 지분 확보뿐만 아니라 계열사 최대주주 등극과정에서의 논란 극복까지, 정 부회장이 유통명가 신세계의 ‘차기 지존’이 되는 길은 아직 먼 셈이다.
천우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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