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고비 넘자마자 전방에 새 ‘암초’
▲ 지난 27일 이건희 전 회장과 홍라희 씨 부부가 서울역사박물관에 마련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 뉴시스 | ||
지난 5월 29일 대법원에서 열린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상고심에서 삼성특검이 기소한 조세포탈 혐의가 인정돼 1, 2심과 같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이 선고됐다. 또한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 혐의가 유죄 취지로 파기 환송됐지만 삼성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웠던 에버랜드 전환사채(CB) 편법증여 혐의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1,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던 에버랜드 전직 사장 허태학 박노빈 씨 혐의도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됐다. 결국 대법원이 이재용 전무의 그룹 경영권 승계 합벙성을 인정해준 셈이다.
삼성재판은 지난 10년여 간 재계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로 자리해왔다. 지난 1996년 에버랜드가 발행한 전환사채를 이 전무가 인수하자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헐값에 편법 장악했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이에 일부 법학 교수들과 참여연대가 지난 2000년 에버랜드 경영진을 검찰에 배임혐의 등으로 고발했고 검찰은 2003년 12월 두 전직 에버랜드 사장을 기소했다.
그런데 삼성 재판 대법원 판결 일정이 공교롭게도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과 한날에 겹쳤다. 에버랜드 재판 결과에 대한 여론의 관심은 여타 재벌에 관한 것보다 뜨거웠지만 결과적으로 ‘노 전 대통령 서거’라는 더 큰 국민적 관심사에 묻혀가는 듯하다.
그런데 ‘무리한 수사’ 논란에 휩싸인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 수사’를 천명한 만큼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에 대한 수사범위 확대가 불가피해 보인다. 이렇다 보니 자칫 천 회장과 이 전 회장의 돈독한 사이가 주목받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천 회장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를 ‘아버님’, 이 전 회장을 ‘형님’이라 부를 정도로 삼성가(家)와 친분이 각별했다고 한다(<일요신문> 887호 보도). 천 회장은 이 전 회장으로부터 사업상 도움도 많이 받았다고 전해진다. 판결 이후 몸 낮추기에 여념 없는 삼성이 천 회장과의 인연 때문에 괜한 구설수에 오를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 맨 위 사진 SK 최태원회장 가운데 사진 LG 구본무회장 맨 아래 사진 현대 현정은회장 | ||
이동통신 점유율 1위인 SK텔레콤을 보유한 최태원 회장의 SK그룹은 속으로 웃음을 지을 만도 하지만 요즘 그다지 속이 편해 보이지 않는다. 노 전 대통령 서거로 국회 일정이 중단되면서 6월 내 공정거래법 개정안 통과 가능성이 불투명해진 까닭에서다.
지난 2007년 7월 지주회사제 전환작업에 착수한 SK그룹은 유예기간 2년이 마감되는 올 6월 안에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 지주회사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SK그룹은 SK C&C→SK㈜→SK텔레콤·SK네트웍스→SK C&C로 이뤄지는 순환출자구조를 이뤄왔다. 당초 SK C&C를 상장시켜 SK텔레콤과 SK네트웍스의 SK C&C 지분 매각으로 상장이익을 챙기는 동시에 순환 고리도 끊으려 했지만 증시불황에 따른 상장연기로 차질이 빚어졌다. 국회 계류 중인 개정안은 지주회사 전환 유예기간 연장(종전 2년에서 3년으로)과 일반 지주사의 금융 자회사·손자회사 보유 허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6월 안에 법안이 통과될 경우 순환출자 해소에 좀 더 시간여유를 갖는 동시에 SK㈜의 손자회사인 SK증권 보유도 용이해질 수 있다.
그러나 법안 통과가 불투명해지면 SK는 앞으로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를 설득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현행법상 공정위가 납득할 만한 사유를 제시하면 지주회사 전환작업 기간을 최대 2년 연장시킬 수 있다.
구본무 LG 회장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검찰의 노 전 대통령 수사 중단 발표로 그간 잠재돼온 근심거리 하나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됐다. 노 전 대통령 아들 노건호 씨가 지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LG전자에 입사(공채)한 인연 탓인지 노무현 정부 기간 동안 LG는 곤지암리조트 특혜 시비 등 여러 구설수에 오르내려야 했다. 노건호 씨와 함께 일했던 LG 동료들은 “(건호 씨가) 업무적 자질도 뛰어난 데다 워낙 깍듯하고 소탈해서 대통령 아들이란 점을 종종 잊게 했다”며 “밖에서 왜들 없는 말을 만들어내는지 모르겠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대선이 있던 해에 노건호 씨가 LG맨이 된 것을 두고 정치권과 재계 일각에선 ‘보험용’이란 수식어를 붙이기도 했다. 삼성 현대차 SK 등 주요 재벌들이 노 정권 때 검찰수사로 곤욕을 치른 반면 4대 재벌 중 유일하게 ‘검풍’을 피한 LG를 향해 “정권교체 이후 수사당국이 주시할 것”이라 관측하는 시선도 있었다.
사실 노무현 정부 세력과 LG 관련 정경유착 의혹이 사법처리 수준으로 확전된 경우는 한 차례도 없었다. 그렇지만 수사 범위가 재계로 확전될 경우 LG가 주목받을 가능성이 검찰청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거론되곤 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따른 수사 전면중단, 그리고 검찰조직 개편설이 나오면서 LG를 향했던 사법당국 주변의 시선은 시들해져 버렸다.
한편 노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격랑에 휩싸인 남북정세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속이 꽤나 복잡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북사업 중단으로 애를 먹던 현대그룹은 대북 평화정책 노선을 지향했던 노 전 대통령 추모 열기 속에 남북관계 긴장 완화 효과를 기대했을 터. 하지만 북측이 노 전 대통령 애도의 뜻을 전하기가 무섭게 핵실험에 나서고 정부가 PSI(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 가입을 결정하면서 이전보다 더한 경색국면을 맞게 됐다.
검찰이 앞으로의 수사대상으로 밝힌 ‘살아있는 권력’은 현 정부 세력을 등에 업은 인사들로 풀이된다. 천신일 회장 등이 주목받으면서 노무현 정부 때 특혜시비가 나돌았던 몇몇 재벌들에 대한 수사설은 한풀 꺾인 상태다. 지난 정권 시절 공격적인 M&A로 몸집을 급격히 키웠다가 현 정권 들어서 유동성 위기설에 시달린 데 이어 검풍까지 맞을까 전전긍긍했을 일부 재벌들이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 법하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