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단계 하청 구조 노동자만 ‘피박’
▲ ‘너무합니다’ 4개월간 임금을 못 받은 노동자들의 거리 시위 모습.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이들에게 임금 체불은 너무 가혹한 일이다. | ||
“아이가 아팠지만 병원에 갈 돈도 없었다. 이건 살인행위다.”지난해 12월부터 A 건설의 화성 동탄 타운하우스 현장에서 일했던 한 40대 목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어렵게 대출을 받긴 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갚아야 할지 막막하다. (임금체불은) 대기업 입장에서는 별거 아닐지 몰라도 우리처럼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에겐 죽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분개했다. 또 다른 50대 목수는 살고 있던 전셋집에서 나와 월세로 옮겨야만 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임금이 체불됐던 노동자 수는 70여 명. 용역업체를 통해 온 사람들까지 합하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피해자들은 판단하고 있다. 액수로 따지면 올해 1월부터 4월까지의 4개월치 임금 2억 원가량이다. 소수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노동자들은 이 문제가 불거지자 임금체불이 적지 않은 규모임을 알게 됐고 단체 행동에 나서게 됐다.
이들의 임금이 지급되지 않았던 것은 지난해 10월부터다. 노동자들은 이때부터 지난 2월까지 5개월 동안 단 한 푼도 받지 못하다가 올해 3월과 4월에 걸쳐 작년 10월부터 12월 사이의 임금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월부터 밀린 월급은 지급되지 않았다. A 건설의 하청을 받고 노동자들을 고용한 B 건설의 경영상황이 점점 악화됐고 4월엔 거의 부도상태를 맞았기 때문이다.
회사만 바라보고 있던 노동자들은 여러 차례 B 건설과 A 건설을 찾아가 어려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때마다 두 회사는 ‘빠른 시일 내에 임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그것은 지켜지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자체적으로 해결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이 문제를 전국건설노동조합(노조·위원장 백석근)에 의뢰했다.
이를 접수한 노조는 A 건설에 교섭을 요청하고 현장사무소장 등을 만나는 등 사태 해결에 나섰다. 또한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과 함께 국민권익위원회에 민원을 제기하고 A 건설과 모그룹 건물 앞에서 피케팅 시위 등을 진행했다. 노조의 한 관계자는 “4개월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는지 지나가던 많은 시민들이 빵과 음료수를 사주며 격려해준 것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임금체불은 개인의 생계를 파탄 내는 범죄다. 특히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일방적인 임금체불이 대출의 기하급수적인 증가 등으로 이어지면서 노동자를 신용불량자로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지난 6월 8일 A 건설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노동자들이 회사에 계좌번호를 통보하는 즉시 그동안 밀린 임금을 전액 지급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A 건설 측은 “하청업자에게 매달 공사대금을 지급해왔다. 우리로서는 중복해 돈을 주게 된 것”이라고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몇몇 하청업자는 일부러 부도를 내기도 한다. 대기업이 임금을 체불할 리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이러한 A 건설 입장에 대해 노조 측과 노동자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꼬집는다. 강문수 노조 경기중부지부 부위원장은 “대한민국 그 어느 회사가 자신이 피해를 보면서 돈을 주겠느냐. 이중으로 돈을 지급했다는 말은 믿기 어렵다”며 “법에도 임금체불은 원청과 하청업체가 연대 책임을 지도록 돼 있다. 굳이 법을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 노동자들은 A 건설이 시행사로 발주한 건물을 지은 것이기 때문에 (A 건설은) 도의적으로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노조에서도 A 건설이 다소 억울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A 건설과 B 건설 사이의 문제라는 것이 노조와 노동자들의 입장이다. 앞서의 노조 관계자는 “여러 차례 A 건설과 B 건설 사이의 대금 지급 등에 대해 자료를 요구했지만 받아 볼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업계의 뿌리 깊은 병폐인 다단계 하도급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자도 직접 확인하기 위해 A 건설 측에 증거 자료를 요청했지만 받지 못했다.
건설업계에서는 B 건설이 부도 위기에 놓인 만큼 A 건설 쪽에서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런 경우 대부분 가압류 상태이기 때문에 어차피 돈을 줘봤자 소용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 대형 건설사의 임원은 “돈을 노리고 일부러 부도를 낸 후 잠적하는 하청업체들도 있기 때문에 경영이 좋지 않으면 일단 돈을 지급하지 않는다. A 건설과 B 건설 역시 비슷한 문제 아니었겠느냐”라고 추정했다.
어찌 됐건 A 건설로서는 이번 일이 알려질 경우 이미지 손상이 불가피할 것으로 판단해 재빨리 임금을 지급한 것으로 보인다. 이 건설사는 더욱이 지난해에도 경기도 의정부에 건축 중인 위락시설에서 장애인 일용직을 포함한 150여 명의 노동자들에게 15억 원 상당의 임금을 체불해 빈축을 산 전례가 있는 터라 협상에 속도를 냈을 것이란 관측이다.
당시에도 하청업체의 경영악화로 생긴 일이었지만 A 건설은 ‘현금을 쌓아두고 있으면서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등의 비난이 쏟아지자 임금을 지급했다. 강문수 노조 부위원장은 “임금체불은 심각한 불법행위인데도 건설현장에서 자주 발생한다. 이를 해결하려는 사회 전체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