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도장 이젠 차세대가 ‘꽝’
▲ 이 멤버 언제 다시 모일까… 지난해 4월 28일 청와대에서 열린 ‘투자활성화를 위한 민관 합동회의’에 참석한 대기업 총수들. 왼쪽부터 구본무 LG 회장,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최태원 SK 회장,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회장,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 ||
이명박 대통령의 이번 미국 순방(6월 15일~18일)을 앞두고 재계에선 주요 그룹 총수들이 이 대통령을 수행할 경제인단의 주축을 이룰 가능성이 거론돼 왔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해온 이 대통령의 경제전문가 이미지 부각 노력이 예상된 것이다.
▲ 삼성 최지성 사장.(위 사진) 현대차 정의선 사장.(아래 사진) | ||
이는 이 대통령 당선 초기 정부-재벌 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비친다. 이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인 지난 2007년 12월 28일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경제인 간담회에서 이 자리에 모인 각 그룹 회장들에게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강조하며 “(어려운 일 있으면) 직접 전화로 연락해도 좋다”고 밝혔다. 회장들은 이에 화답하듯 적극 투자 유치를 약속했다.
그런데 이때 이후로 이 대통령과 4대 재벌 총수들이 한 자리에서 만나는 광경을 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게 됐다. 지난해 4월 현 정부 출범 직후 첫 미국 순방 때도 4대 재벌 총수들은 동행하지 않았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4대그룹 총수가 대통령 순방에 빠진 것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 방문에 이은 4월 말 일본 순방 땐 특검 수사를 받고 있던 이건희 전 회장을 제외한 정몽구 최태원 구본무 회장이 합류해 이 대통령의 일정을 함께했다. 재벌에 비판적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해외 순방길에도 따라나섰던 이들 총수들이 친 기업 성향을 표방한 이 대통령의 첫 공식 해외일정을 아주 모른 척할 수는 없었던 셈이다.
사실 ‘재벌 총수들이 대통령 순방길에 따라나서는 것을 무척 꺼린다’는 것은 재계에선 정설로 통한다. 대통령의 해외일정 성과를 빛낼 만한 결과물 혹은 대규모 투자유치나 고용 창출 같은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아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일부러 없던 스케줄까지 만들어 대통령 수행을 고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지난해 말 한 사정기관이 각 대기업에 고용 투자 등 사업계획 제출을 요구해 오너들의 속내를 불편하게 만든 일도 있었다.
▲ SK 최재원 부회장.(위 사진) LG 남용 부회장.(아래 사진) | ||
4대 그룹이 총수들 대신 수행단으로 내세운 인사들의 면면에서 각 재벌의 노림수가 엿보이기도 한다. 삼성을 대표하게 된 최지성 사장에 대해 삼성 측은 “주력사(삼성전자)의 CEO(전문경영인)로서 참여하게 된 것”이라 밝힌다. 윤종용 전 부회장이 삼성전자 대표이사를 맡고 있을 당시 이건희 전 회장을 대신해 윤 전 부회장이 대외행사에 자주 참석했던 전례에 빗대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올 초 대대적인 조직개편으로 이윤우 대표이사 부회장과 최지성 사장이 각각 부품사업부와 완제품사업부를 지휘하는 투톱 시스템을 구축했다. 삼성전자 대표이사인 이 부회장 대신 최 사장이 미국 수행길에 나선 것에 대해 삼성 측은 “아마도 두 분이 스케줄을 조율하면서 (최 사장으로) 결정하게 됐을 것”이라고 밝힌다. 재계 일각에선 이 전 회장 아들 이재용 전무의 최 사장에 대한 신뢰가 각별하다는 점에서 최 사장의 그룹 내 위상강화로 해석되는 분위기다.
현대·기아차그룹 ‘황태자’ 정의선 기아차 사장은 부친 정몽구 회장의 미국일정을 수행하다 현지에서 경제인 수행단에 합류했다. 정 회장은 지난 9일 미국 뉴욕에서 경제교류를 통한 한·미 우호증진 기여 공로로 친선단체 코리아소사이어티가 주는 ‘밴플리트상’을 수상했다.
재계에선 주력사의 대표이사들 대신 정 사장이 수행단에 참여한 배경을 기아차 대표직 복귀 혹은 그룹 경영권 승계 가속화 수순으로 보려는 시각이 더 많다. 정 사장은 지난 2008년 4월 실적부진 논란 속에 기아차 대표직을 사임하고 해외 활동에 주력해왔다. 그런데 최근 기아차가 미국 등 해외무대에서 호평을 받고 실적개선이 이뤄지면서 정 사장의 대표직 복귀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해석이 뒤를 따르게 됐다.
SK그룹 역시 현대차와 마찬가지로 총수일가를 사절단에 포함시켜 눈길을 끌었다. SK에선 최태원 회장을 대신할 수 있는 인사로 김신배 SK C&C 부회장이나 정만원 SK텔레콤 사장 등이 꼽혀왔지만 이번 미국행엔 최 회장의 친동생 최재원 부회장이 나섰다. SK 측은 “(최 부회장이) 그룹의 글로벌위원장을 맡고 있어서 순방길 수행에 나서게 됐다”고 연유를 밝혔다.
재계에선 최태원 회장의 최재원 부회장 ‘힘 실어주기’ 일환으로 보는 분위기다. 최 부회장은 올 초 그룹의 지주회사인 SK㈜와 주력사 SK텔레콤의 등기임원으로 전격 발탁돼 그룹 경영 최선봉에 서게 됐다. 최 회장의 사촌인 최신원 SKC 회장-최창원 SK케미칼 부회장 형제의 분가설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최 회장이 친동생의 대내·외적 위상을 높여 친정체제를 더욱 강화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LG그룹에선 주력사인 LG전자 대표이사 남용 부회장이 이 대통령 수행길에 올랐다. 남 부회장은 구본무 회장의 부친 구자경 명예회장을 지근거리에서 오랫동안 보좌했던 인물. 삼성 현대차 SK가 총수일가나 후계체제의 핵심인물을 미국행 비행기에 태워 보낸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대통령 미국 순방을 앞두고 재계 일각에선 구 회장 최측근으로 급부상한 조준호 ㈜LG 대표이사 부사장이 미국행 후보로 거론됐지만 구 회장은 미국 전자제품 시장에서 호평을 받는 LG전자의 대표이사를 보내는 ‘무난한’ 선택을 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