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밋빛 전망 속 시장은 아직 ‘덤덤’
세계경제의 두 축인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B)의 두 수장은 지난 8일 한목소리로 인플레이션 우려를 강하게 제기했다.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IMF 총재와 로버트 졸릭 WB 총재가 몬트리올의 한 포럼에 참석해 “경기가 회복되면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 “더 이상 경기부양책에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고 잇단 경고음을 날린 것이다.
지난 12일에는 선진 8개국(G8) 재무장관이 회담을 마친 뒤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위기 대응을 위한 예외적 정책을 경기회복이 확실해진 시점에 원래대로 되돌리기 위한 적절한 출구 전략(유동성을 늘린 경기부양책에서 빠져나오는 전략)은 국가별로 다를 수 있지만 지속 가능한 회복을 위해 불가피하다. IMF에 필요한 분석 작업을 요청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는 인플레이션을 나타내는 지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국제 유가는 오름세가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다. 지난해 말 30달러대까지 떨어졌던 두바이유 현물가격은 이미 배럴당 70달러 선을 넘어섰다. 구리와 알루미늄 등 각종 원자재의 가격도 50% 이상 뛰었다. 이와 같은 1차 산품(Commodity)의 가격 상승은 머지않아 인플레이션 압력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특히 경기침체로 인해 세계적으로 노는 공장 설비들이 급증한 상황에서 이러한 원자재 가격 상승은 이상 현상이다.
시장조사기관 팩트셋(FactSet)에 따르면 14개 세계 주요국의 올 1분기(1∼3월)설비 가동률은 최근 3년(2006~2008년) 가동률 고점에 비해 10%포인트 이상 하락했다. 특히 일본은 최근 3년 동안 가장 높았던 설비 가동률은 87%였지만 금융위기에 따른 글로벌 경기침체와 엔화 강세 등 악재가 겹치면서 올 1분기 가동률이 54%까지 추락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앙인 미국의 설비 가동률도 급격하게 하락했다. 3년간 최고 79%까지 올랐던 미국의 설비 가동률은 올 1분기에 67%로 12%포인트 떨어졌다. 최근 2차 금융위기 우려를 낳고 있는 유로존 역시 올 1분기 설비 가동률이 최근 3년 최고치보다 10%포인트 하락해 75%를 기록했다.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 역시 경기침체를 피해나가지 못했다. 최근 3년 사이 88%를 기록했던 중국 설비 가동률은 올 1분기에는 77%로 추정된다. 우리나라도 최근 3년 사이 82%까지 올랐던 설비 가동률이 올 1분기 69%까지 떨어졌다.
금융업계의 한 관계자는 “실제 각국의 제조업 지수는 전년과 비교해 20% 이상 하락한 뒤 아직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는 것은 각국이 기업들의 유동성 안정을 위해 풀어놓은 자금이 제조업 등 필요한 곳으로 가지 않고 투기자본화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인플레이션을 가져와 오히려 세계경제 회복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현재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출구전략 논쟁은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인플레이션을 가장 잘 반영한다는 로이터-제프리스 CRB지수가 최근 들어 상승폭을 키우고 있다. CRB지수는 원자재가격이 급등하던 지난해 7월 2일 473.52로 사상최고치를 기록했다. 하지만 이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급격히 하락해 지난 3월 2일에는 200.34까지 떨어졌다. 이렇게 급락했던 CRB지수는 지난 11일 265.64까지 오르며 연중 최고치를 기록했다. 5월 한 달 동안은 13.79%나 뛰어 1974년 7월 이후 월간 상승률 최고치를 나타냈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사용해온 금융 및 재정정책의 변경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경기 바닥론을 내놓은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1일 “단기간에 소비자물가가 큰 폭으로 오르지는 않겠지만 최근 원유, 곡물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고 공공요금도 오르고 있다. 2~3개월 전에 비해 물가가 불안정해졌다”며 정책기조 변화 가능성을 시사했다.
반면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하루 뒤인 12일 “2분기(4∼6월) 성장률이 전분기 대비 플러스가 되더라도 여전히 전년 동기대비 성장률은 마이너스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가 회복됐다고 볼 수는 없는 것 아니냐. (경기회복은) 사람들의 착시현상일 뿐”이라며 “적극적 재정·금융정책에 변화를 줄 시기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이런 경제 방향성에 대한 논란과 관련해 정부에서는 한국 경제의 방향성이 7월에 잡힐 것이라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기획재정부의 한 관계자는 “현재 산업생산 감소폭은 둔화되고 있지만 소비재 판매와 실업률은 여전히 안 좋은 상황이다. 2분기 경제지표가 나오는 7월 중순이 되면 한국 경제가 바닥을 찍었는지, 아직 하강상태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정부 고위관계자도 “현재 한국 경제는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정부 재정정책의 결과로 봐야 한다. 현재의 흐름을 소비 증가나 설비투자 등 민간차원에서 받아줘야 하는데 현재 지표에서는 소비와 설비투자가 여전히 부진하다”면서 “7월에 2분기 경제지표가 발표되면 민간 경제지표가 돌아서는지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 여기서 민간차원 경제가 살아나는 것이 보여야 한국경제가 바닥을 찍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인플레 베팅’ 할까 말까
원유·원자재·금·부동산 주목
물가상승 장기간 계속될 듯
오는 7월에 한국경제의 방향이 결정되더라도 물가 상승은 장기간 계속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인플레이션 지속 가능성이 큰 만큼 원유나 원자재 펀드에 대한 투자, 인플레이션 내성이 강한 금이나 부동산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것을 고려하라고 조언했다.
증권업계의 한 관계자는 “세계 경기 하강이 완화됐다, 경기가 바닥을 찍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어서 원유와 원자재 가격 상승은 당분간 피하기 어렵다. 경기가 회복된다는데 원유와 원자재를 사놓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면서 “특히 원유와 원자재 선물을 사놓으면 언젠가 오를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투기세력들까지 몰리는 기미여서 인플레이션이 수반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최근 국제 금값이 온스당 900달러를 넘어선 데 이어 일각에서 1200달러 예측도 나오고 있는 것은 인플레이션을 염두에 둔 투자를 보여주는 것이다. 5월 출시된 주택청약종합저축주택의 가입자가 한 달 만에 1100만 명을 넘어선 것 역시 같은 현상”이라면서 “아직 상승 여력이 있는 만큼 가격 등락을 보면서 원유나 원자재 펀드에 대한 투자 시기를 살피는 것이 좋다. 또 인플레이션 회피용으로 인기가 높은 금 관련 상품이나 최근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부동산에 대한 투자를 고려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준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