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하면 뻔뻔해도 용서가 된다
업무를 다 끝내고도 멀뚱히 앉아 자리만 지키는 것은 고역이다. 할 일 없이 회사에 남아 있는 것만큼 힘든 것도 없다. 그렇다고 눈치 없이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수도 없다. 살길은 오로지 퇴근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사는 칼퇴근하는 직원을 곱지 않게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용기 있는 ‘칼퇴근족’이 있다. 게임업계에서 일하는 B 씨(30)는 7시가 되면 컴퓨터를 끄고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동료와 상사에게 인사를 하고 퇴근한다.
“이직한 지 1년쯤 됐는데 처음에는 정시 퇴근하는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더라고요. 이쪽 분야가 야근을 밥 먹듯이 하거든요. 하지만 꼭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습관처럼 회사에 남아 있는 분위기가 대부분이죠. 이젠 다들 제때 퇴근해도 ‘그러려니’ 합니다. 평소에 놀면서 칼퇴근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눈치 보면서 머뭇거리는 게 더 어리석다고 말하는 그는 당당하다. 남들이 차 마시면서 노닥거릴 때 일한다. 일이 밀려서 허덕거리지도 않는다. 효율적으로 일하고 과감하게 퇴근한다. ‘더 시킬 일이 없는지…’, 갈 때는 마무리용 인사도 잊지 않는다. 할 거 다 하고 가는 부하직원을 붙잡는 상사는 거의 없다. 뭔가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렇다고 나무랄 수도 없다.
B 씨는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하고 늘 같이 퇴근하는 게 아니라서 때로 혼자 동떨어진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다”며 “쓸데없이 회사에 남아 시간을 죽이느니 다소 눈총을 받더라도 제 시간에 퇴근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비슷한 유형이지만 이미지는 덜 나빠지는 방법도 있다.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면 칼퇴근이 수월해진다.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Y 씨(여·27)는 동료들보다 1시간 정도 일찍 출근한다. 분위기상 남들과 똑같이 일하면서 정시에 퇴근하는 것이 눈치 보여 차라리 일찍 출근하는 방법을 택했다. 여기에도 요령이 있다.
“그냥 일찍 출근하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요. 조용히 일찍 와서 칼퇴근하면 욕먹는 건 똑같죠. 무조건 떠들어야 해요. 그리고 분위기를 몰아가는 거예요. ‘난 일찍 나왔고, 일찍 왔으니 제때 퇴근하는 건 당연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자주 꺼내는 거죠. 그리고 이리저리 바쁘게 오가면서 평소에 바쁜 척을 해야 해요. 일이 없어서 일찍 가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하죠.”
‘귀여운’ 방법도 있다.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는 가능할 법한 기발한 방법이다. 작은 회계사무소에서 일하는 H 씨(여·26)는 가끔 회사 시계를 이용한다.
“15명 정도가 한 사무실에서 일하는데 대부분 나이가 좀 든 분들이에요. 휴대폰이 있어서 그런지 손목시계를 다들 안 하세요. 시간을 볼 때는 대부분 사무실에 걸린 벽시계를 보곤 해요. 근데 시계를 살짝 빠르게 돌려놓으면 모르시더라고요. 회사에서는 휴대폰 체크도 거의 안하는 분들이라 퇴근한다고 하면 사무실 시계 한번 보고 잘 가라고 하시죠.”
처음에는 ‘이 방법이 과연 먹힐까’ 반신반의하면서 장난삼아 시도했는데 무사통과여서 애용하고 있다고. 그래 봐야 20~30분 정도만 시계를 돌릴 수 있지만 단 10분이라도 일찍 갈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지병’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업무에 전혀 지장을 주진 않지만 사람들에게 ‘고역이겠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질병들을 활용하는 것. 아토피나 건선 같은 경우가 유용하다. 교육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O 씨(여·29)는 가벼운 아토피를 앓고 있다. 심하진 않지만 음식조절을 잘못 하거나 환절기가 되면 눈에 띌 정도로 피부에 생채기가 날 때가 있다.
“티 날 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해요. 대부분 얼굴은 멀쩡하니까 별것 아니라고 생각해서 병원이라도 가려고 하면 눈치를 주거든요. 창피하다고 숨기지 말고 팔이나 다리 같은 경우 옆자리 동료나 친한 사람들한테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눈치 안 보고 병원에 갈 수 있어요. 매일 쓸 수 있는 방법은 아니지만 급할 때 유용하고요, 그렇게 칼퇴근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굳이 병원 핑계를 대지 않아도 일찍 일어나는 게 자연스러워져요.”
그의 경우 한의원에 치료 프로그램을 끊었다고 하거나 유명한 병원이 있어서 가봐야겠다고 하면 대부분 “어서 가라”고 등을 떠밀어 준다. 때로 회식자리를 피하고 싶거나 술을 마시고 싶지 않을 때도 이유를 댈 수 있다. 술을 마시면 가려움증이 심해진다고 호소한다는 것. O 씨는 “일단 자기 일을 확실히 끝내고 동료들과의 사이도 원만해야 쓸 수 있는 방법”이라며 “안 그러면 큰 병으로 오인돼 이미지가 나빠지는 것은 물론 최악의 경우 인사상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경제가 좋지 않아서 다들 언제 내몰릴지 모르는 상황인데 스스로 경쟁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지더라고요. 학원에 간다고 하니 ‘뭘 더 배우느냐’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핀잔을 주던 상사도 있었어요. 지금은 저를 시작으로 몇몇 분들도 학원에 다닙니다. 이제는 다들 이런 분위기를 당연히 여기고 있죠.”
업무 특성상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학원을 다니면서 칼퇴근을 즐기는 직장인도 있다. 영업부서에 근무하는 J 씨(32)는 악기를 배우고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드럼을 쳐왔지만 한계를 느껴서 전문적으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에서는 제가 직장인 밴드를 병행하는 걸 알고 있어요. 영업 쪽이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과의 모임을 권장하는 편이죠. 학원에 다닌다고 하니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주의를 주는 분위기도 아닙니다. 외근을 할 경우가 많아서 바로 퇴근한다고 하고 레슨 받으러 갈 때도 있고요.”
때로 거래처 사람들과의 저녁 약속이 있다고 하거나 일찍 퇴근하는 사람들에게 묻어서 가는 방법도 쓴다. J 씨가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직장인들의 ‘칼퇴근 꿈’은 요원하다. 꼭 해야 할 일이 남았다면 모르지만 일을 다 마치고도 눈치를 봐야 하는 한국의 기업문화가 옳지 않다는 지적도 많다. 눈치 없는 칼퇴근은 ‘칼을 맞지만’ 요령 있는 칼퇴근은 생활의 활력소가 될 것이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