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감세 채우려던 ‘돌려막기 카드’ 뭇매
▲ 대통령 눈치만…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강화 선언 직후인 지난달 25일 동대문구 이문동 골목상가를 방문해 어묵을 먹으며 현지 상인들과 이야기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지난해와 올해 중반까지만 해도 정부는 과감한 세수감면책을 썼다. 법인세와 종합부동산세 등을 낮춰서 부자들과 대기업의 지갑을 열어 경제를 성장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다시 세수를 늘리겠다는 것이 그 배경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초기부터 부자감세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의지가 워낙 강해 야당과 시민단체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사천리로 추진됐다.
그런데 경기는 전혀 회복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세수 확보라는 목표가 방향점을 잃어버리면서 사단이 나기 시작했다. 정부의 국가채무는 올해 366조 원으로 국내총생산(GDP)의 35.6%에 달한다. 내년에는 각종 세금 감면에 따른 세수부족으로 나라 빚이 400조 원을 넘길 것이 확실한 상태다.
나라 곳간이 비는 것에 민감한 기획재정부는 당장 곳간을 채워놓을 묘안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부터 부가세 인상을 시작으로 약간 설익은 증세 방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정부가 추진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은 비과세·감면제도 축소와 담배·술 세금 인상이었다.
180여 개에 달하는 비과세·감면제도는 과세제도의 혼란을 가져오는 데다 우리나라 외에 어느 나라도 이렇게 많은 비과세·감면제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었다. 또 담배와 술에 붙는 세금 인상은 ‘죄악세’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등 속도가 붙었다. 여당에서도 어느 정도 동조하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강화를 선언하고 서민 챙기기에 나서면서 이러한 정책 고민들은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 25일 청와대에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한 뒤 서울 이문동 골목상가를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 상인들과 비빔밥을 나눠 먹고, 시민들과 떡볶이를 함께 먹는 등 서민 밀착형 행보를 보였다. ‘강부자 정부’ 낙인을 지우기 위해 청와대가 일부 노선을 ‘좌클릭’한 것이다.
이렇게 청와대의 분위기가 일변하자 그동안 재정부에서 고민해왔던 증세 정책들은 한순간에 반 서민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폐기대상이 됐다. 축소가 검토되던 비과세·감면제도는 중소기업 투자세액공제와 농어업용 부가세 영세율 등 서민층 대상 감면제도들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정리 이야기 자체가 쑥 들어갔다.
▲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 청와대사진기자단 | ||
술과 담배에 붙는 세금 인상 논의도 서민들에게 부담이 된다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없던 일이 됐다. 이러한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이 지난 13일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전체회의다. 이 자리에서 민주당뿐 아니라 한나라당 의원들까지 나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최경환 한나라당 의원은 “당 정책위에서 술과 담배세 인상 논의를 공식적으로 중단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여론만 나빠지는 만큼 재정부 장관이 조속히 결단을 내려달라”고 요구했다.
진수희 의원도 “왜 지금 이 시점에서 술·담배세 인상 이야기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정부 내에 일이 잘 안되기를 바라는 음모 세력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에 윤증현 재정부 장관도 “국민건강, 사회적 비용 경감차원에서 검토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서민부담 증가로 이어진다는 지적이 있는 만큼 참고하겠다”고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부자 감세와 서민 증세’의 주무부처처럼 인식되기 때문인지 요즘 윤 장관을 포함한 재정부 고위간부들의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본뜬 친 서민행보도 이어졌다. 지난 6월 30일 이용걸 2차관이 주재한 가운데 ‘하반기에 달라지는 서민생활’이라는 기자회견이 있었고, 다음날인 1일에는 허경욱 1차관이 인천시 서구 심곡동에 있는 노숙인 생활시설 ‘은혜의 집’을 찾아 150만 원어치의 생필품을 전달하고 점심 배식을 도왔다. 10일에는 윤 장관까지 서울 관악구 봉천동 동명노인복지센터를 찾아가 점심식사 준비를 돕고 식사를 함께했다. 물론 윤 장관이나 허 차관 모두 그 자리에서 노인복지시설과 노숙인 지원시설을 확충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재정부의 또 다른 관계자는 “요즘 분위기는 심하게 말하면 서민 노이로제 수준이다. 친 서민적이지 않은 정책들은 고려나 발표 대상에서 제외되고 서민적이라고 보이는 정책들이 전면으로 나오고 있다”면서 “내년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권의 입김이 강해지면서 큰 틀의 재정건전성이나 정책일관성보다는 친 서민적으로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과연 서민들이 이 정부를 서민적으로 평가할지는 의문이 여전하다. 금융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부분 사람들은 부자 감세를 실컷 하다 돈이 모자라게 되자 서민들의 주머니를 노렸고, 그러다 비난이 쏟아지자 없던 일로 덮었다고 보고 있다”면서 “특히 스폰서와 호화쇼핑 등으로 논란을 불러왔던 ‘천성관 파문’이 이 정부는 기본적으로 부자 정부라는 인식을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의 각종 친 서민노선 선언과 서민대책 발표에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자금이 떨어져가는 것도 화약고다. 노무현 정부 당시 지방정부의 돈줄이었던 종합부동산세는 이 정부에서 폐지됐다. 또 신설하기로 한 지방소비세와 소득세는 지방자치단체 간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켜 서민들이 많은 지역의 재정 악화를 가져올 가능성이 크다. 줄어들고 있는 지방정부 재정 대부분이 학교급식 등 서민생활 지원과 관련된 것이어서 정부 공언과 달리 서민대책은 벌써부터 공전 기미를 보이고 있다. 실제 경기도는 예산부족을 이유로 무료급식비 예산을 절반으로 줄였고, 대구시도 2차 추경에서 유아교육진흥원 설립비 82억 원을 전액 삭감하는 등 지방자치단체들의 서민지원책 줄이기가 진행 중이다.
이준석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