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곳 잃은 돈 지하로 지하로…
# 버냉키의 경고
“지금의 통화정책을 유지하겠지만 경제상황에 따라 채권 매입 규모를 줄이거나 늘리는 등 속도를 조절하겠다.”
지난 5월 21일 미국 워싱턴의 의회합동경제위원회 청문회. 밴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한마디가 글로벌 금융시장의 방향을 바꿨다. 지난 5년간 ‘달러 살포’를 주도했던 버냉키가 드디어 정책 전환을 선언한 것이다. 시장은 폭락으로 반응했다. 이후 버냉키 의장은 “당장 돈을 거둬들이는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이미 시장에는 FRB의 방향전환 신호가 입력됐다.
홍기석 드림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은 “미국 경제가 좋아져도, 나빠져도 모두 악재인 딜레마에 빠졌다”며 “좋아지면 돈을 거둬들일 것이란 우려가, 안 좋아지면 ‘얼마나 심각하길래’란 우려가 시장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 아베노믹스의 역설
올 초 일본 증시를 후끈 달궜던 아베 총리의 무제한 화폐공급 정책, 이른바 ‘아베노믹스’에 제동이 걸렸다. 아베노믹스로 인한 엔저(엔화가치 하락)는 우리 기업들의 수출경쟁력을 떨어뜨린 주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 그런데 아베노믹스의 부작용이 드러나면서 실패 우려가 높은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기업들의 수출경쟁력 전망은 여전히 어둡다.
아베노믹스의 실패는 일본 국채가격 폭락(금리급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일본 은행권에 대한 타격과 함께 신용경색을 초래해 엔화 가치를 더욱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가 많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정책적인 입장이나, 기업 경영을 하는 입장에서 환율은 가장 먼저 입력해야 할 변수”라면서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으면 어느 과녁을 목표점으로 잡아야 할지 매우 난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아베노믹스를 두려워했지만, 아베노믹스의 실패도 걱정해야 하는 역설적 상황인 셈이다.
# 삼성전자 주가의 좌초
지난 2009년 45만 3000원으로 시작한 삼성전자 주가는 지난 12일까지 두 배 넘게 올랐다. 같은 기간 코스피 수익률 70%보다 세 배 가까이 높다. 주식투자 환경이 악화되면 그동안 쌓은 수익을 확정하려는 게 기관투자자들의 일반적인 행동이다. 앞서 언급한 미국의 출구전략 신호, 일본 경제의 방황은 모두 우리 기업 실적에 부담으로 작용해 투자자들의 수익확정 욕구를 자극했다.
차익실현 욕구를 더욱 부추긴 것은 삼성전자의 실적 전망이다. 올해 1억 대를 팔 것으로 예상됐던 스마트폰 ‘갤럭시S4’가 6000만~7000만 대밖에 팔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 것이다. 한 펀드매니저는 “사실 애플 아이폰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삼성전자의 갤럭시 시리즈가 더 팔릴 것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소비자들은 갤럭시에 대해서도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특히 삼성전자는 국내 상장사 이익의 20% 이상을 차지해왔다. 다른 상장사들의 이익이 주춤할 때도 삼성전자 이익은 질주했다. 그런데 이제 삼성전자 이익이 주춤할 것이란다. 한국 증시의 마지막 보루가 흔들리는 셈이다.
# 독이 될 금리 상승
5월 이후 지표채권인 국고채 3년은 0.39%포인트(p), 정부가 최근 발행을 늘리고 있는 국고채 10년물은 0.54%p 급등했다. 신흥국에 몰렸던 선진국 자금이 미국의 출구전략 신호에 반응해 본국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경기가 부진한데 금리가 오르는 것은 경제에 독이다. 특히 가계부채 부담이 큰 우리 경제에는 치명적일 수 있다.
신동준 동부증권 투자전략본부장은 “국고채의 15%, 통화안정증권(통안채)의 20%를 외국인이 보유 중이다. 금융위기 이후 달러 약세와 신흥국 통화 강세, 외국인의 신흥국 자금 유입 흐름이, 이제는 달러 강세와 신흥국 통화 약세, 신흥국에서 선진국으로의 채권 자금 이동으로 서서히 바뀌게 될 것”이라며 “미국 출구전략은 원화채권 금리를 동반 상승시킬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올해 정부가 발행할 국채는 추가경정예산을 포함해서 100조 원에 육박한다. 금리가 오르면 이자부담도 늘고, 결국 재정부담으로 직결된다. 재정부담은 정부신용도에 영향을 미치고, 외국인 투자심리를 악화시킬 수 있다. 이제 외국인은 주식뿐 아니라 채권시장에서도 최대 큰 손으로 등극했다.
# 환율의 방황
금융시장 위기 국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 바로 환율 상승이다. 외국인 자금 이탈은 달러 수요를 자극해 원화가치를 떨어뜨린다. 5월 초 1101원이었던 원-달러 환율은 13일 현재 1133.6원으로, 30원 넘게 올랐다. 3% 가까운 절하다. 즉 외국인으로서는 그만큼 달러환산 투자자산 가치가 하락한 것이다. 환율 상승은 다시 환차손 우려를 자극해 다시 외국인 자금이탈을 부추긴다. 최근 5년평균 원-달러환율이 1160원이니 2.4%가량 더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주식보다 채권자금 이탈이 환율을 더욱 자극하는 데 있다.
5월 이후 외국인들이 6월 13일까지 국채선물(3년)시장에서 순매도한 금액만 15조 원을 넘는다. 같은 기간 주식시장(코스피)에서의 순매도 금액 2조 2000억 원의 7배 가까운 규모다. 현재 외국인의 국내 채권 보유 규모는 사상 최대다. 2010~2011년 대규모로 유입됐는데, 3년만기 국고채나 2년 만기 통안채가 많다. 올해 내년 사이 대거 만기가 돌아온다. 이 자금이 다시 국내에 투자되지 않고, 해외로 빠져나간다면 엄청난 충격이 불가피하다.
정부의 한 고위관료는 “외환위기는 주식이 아니라 채권에서 비롯돼 환율시장까지 뒤흔들었다”며 “외국인의 채권시장 영향력은 1997년보다 훨씬 높다. 외국인 자금의 급격한 이동과 이에 따른 외환시장 움직임을 면밀히 모니터링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지하경제 ‘활성화’
5만 원권이 품귀현상을 보이고 있다. 국제 금값이 떨어지는 데도 금괴 판매는 불티가 난다. 금고가 백화점 인기 판매 아이템이 됐다. 박근혜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현실은 ‘지하경제 활성화’다. 화폐개혁 소문까지 나돌 정도로 금융시장이 흉흉하다.
주식시장 거래대금이 바닥 수준까지 떨어지고, 펀드 등 금융상품에는 돈이 들어오지 않은 지 오래다. 원금이 보장된다는 은행예금도 꺼린다. 워낙 저금리라 실질가치 하락 위험이 있는 데다,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 하향으로 세금을 징수당할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한 자산운용사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저금리, 저성장 시대에는 실질가치 하락을 막을 수 있고 동시에 세테크도 가능한 투자처가 필요한데,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이 모두 패닉상황이고 정부는 세금 걷는 데 팔을 걷어붙이고 있으니 금융권으로 돈이 들어올 리가 없다”며 “심각한 신용경색 상황으로, 이대로라면 금융시스템에 심각한 위기가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