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자루’ 아닌 ‘알밤’이 돼라
▲ 9월 열린 2009 대한민국 취업박람회 전시장에 많은 취업지망생들이 입사 희망 기업의 채용 정보를 얻기 위해 방문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졸업을 앞둔, 혹은 갓 졸업한 상황에서 사회생활을 미리 경험해 본다는 것은 두렵고도 설레는 일이다. 대부분 자신이 배워온 이론을 현장에서 멋지게 적용하고 싶은 꿈을 꾸며 인턴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기업 입장은 다르다. 기껏해야 3개월 정도를 근무하다 갈 사람에게 중요한 업무를 맡길 수도 없다. 때문에 꿈과 현실의 괴리감은 점점 커진다. 언론학을 전공하고 있는 Y 씨(27)는 졸업을 앞두고 이력서 쓰기에 열중하고 있다. 취업을 위해 다양한 경험도 쌓았다. 물론 인턴 생활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인턴 생활에 대한 추억은 한마디로 ‘고생담’이다.
“경기도에 있는 한 케이블TV사에서 인턴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바로 지원했어요. 운이 좋아 합격했다고 생각했고, 당시에는 정식으로 취업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처음 출근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방송 일을 좀 배울 수 있겠구나 기대가 많았어요. 하지만 현실은 너무 달랐습니다. 3개월 내내 진짜 군대만큼 힘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밖에 돌아다니면서 케이블을 연결하고 설치하는 현장을 쫓아 다녀야 했어요. 방송일은커녕 일용직을 하다 온 것 같았죠.”
Y 씨는 “인턴 경험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실망이 큰 건 사실”이라며 “인턴 생활에 너무 큰 환상을 갖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부푼 꿈을 안고 가서 중도에 포기하거나 시간만 때우고 오게 되는 경우도 많다. 정보통신회사에서 인턴생활을 했던 C 씨(여·24)는 영문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실제 회사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전공과 관련성이 적은 회사에 지원한 것이 잘못이지만 실제 취업 시장은 반드시 전공과 연결되진 않잖아요. 그래도 작은 일이라도 배울 수 있고 어차피 일반 기업에 취업할 테니 이번 기회를 활용해 열심히 배우자고 다짐했어요. 그런데 막상 회사에 가니 마치 제가 ‘유령인간’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일주일 내내 회사 지침서와 관련 용어만 보고 또 봤습니다. 하는 일 없이 책상을 차지하고 앉아서 딱히 다른 일을 할 수도 없고 정말 고역이더라고요.”
C 씨와 같이 들어왔던 10명 중 3명이 중도에 그만뒀다. 그녀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끝까지만 버티자’는 일념으로 3개월을 지냈다. 그는 “뭔가 거창한 업무를 맡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실제는 좀 심했다”며 “간간이 주어지는 잔심부름도 그나마 막판에는 끊겼다”고 털어놨다. C 씨처럼 돌아갈 학교가 있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다. 졸업 후 인턴 생활을 하는 것은 예상치 못했던 ‘비애감’까지 맛볼 수도 있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 공기업 행정인턴 생활을 했던 L 씨(28)는 씁쓸한 상황을 여러 번 겪었다.
“정식 취업 전에 돈도 벌고 공기업이지만 기본 업무는 익힐 수 있을 것 같아 시작했어요. 하지만 환영은커녕 단순 사무보조가 한 명 더 들어왔다고 여기는 것 같았죠. 자잘한 심부름부터 귀찮은 일은 다 제몫이었습니다. 당당히 정시에 퇴근하고 이후에 여유롭게 지내니까 몸이야 편하죠. 하지만 이방인 같은 느낌은 지울 수 없었어요. 신용카드 모집인들이 많이 왔었는데 만들 생각도 없었지만 한참을 설명하다 인턴이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져온 자료를 바로 치우더라고요.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면서 민망했습니다.”
물론 비슷한 입장에서도 인턴으로 시작해 당당히 정식 직원으로 연결시킨 사람들도 있다. 주어진 업무만 하거나 불만족스러운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 전략이라면 전략이다. 건설 환경학을 전공하고 건설회사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한 K 씨(28)는 인턴생활을 끝내고 정직원으로 입사했다.
“처음에는 여느 인턴 직원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어요. 친구들을 만나 얘기를 나눠 봐도 다 비슷하더라고요. 잔심부름 아니면 자리만 지킨다는 소리가 많았죠. 그렇게 3개월을 낭비하고 백수가 되고 싶진 않았어요. 원래 지원팀 소속이었지만 주어진 일이 없거나 시간이 남으면 다른 부서에도 기웃대며 열심히 일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렇게 하니 작지만 조금씩 일다운 일을 주더라고요. 그리고 조용히 구석에서 동상처럼 있다 가진 않았습니다. 넉살좋게 말도 많이 걸고 소주 한잔 사달라고 매달리고 적극적으로 먼저 다가갔죠. 친분이 생기니 자연스레 서로 동질감을 느끼더군요.”
K 씨는 수동적으로 생활하면 올 기회도 안 온다는 평소 생각에 충실했다. 그는 “무시당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서 아이디어 제안도 해야 한다”며 “그래야 직접 마케팅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때로 귀여운 실수로 웃음을 주거나 상사에게 황당함을 ‘선물’하는 것도 인턴의 몫이다.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이 없어 저지르는 실수나 세대차이로 인한 기본예절과 관련된 실수가 대부분이다. 얼마 전 인턴생활을 마친 S 씨(여·25)는 회식 때 생각을 하면 아직 얼굴이 화끈거린다.
“인턴을 시작하고 처음 하는 회식이었어요. 인원도 꽤 많고 처음이라 정신도 없었죠. 직원들을 안내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늦게 장소에 갔는데 마침 빈자리가 보이더라고요. 잘 됐다 싶어 얼른 앉았는데 다들 절 쳐다보는 거예요. 알고 보니 잠시 화장실 가셨던 부장님 자리였죠.”
이 일을 계기로 회사 내 ‘예절’에 대해 더 조심스러워졌다는 S 씨는 주변 친구들의 웃지 못 할 이야기도 많이 전해 듣는다. 택시 탈 때 버릇처럼 무조건 뒷자리에 앉는 바람에 상사가 앞자리로 밀려나기도 하고 동기끼리 호칭을 편하게 하다가 꾸지람을 들은 친구도 있었다. 그는 “짙은 색 스키니진에 단정한 재킷을 입고 출근한 적이 있었다”며 “짙은 색이지만 청바지 자체가 튀는 패션이라는 것을 알고 당황했었다”고 말했다.
대학 취업지원센터 인턴십 체험기 리포터로 활약하는 H 씨(25)는 “이런 저런 말이 많아도 인턴 프로그램은 분명 정식 취업에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라며 “회사는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학생 때처럼 가만있어도 옆에서 누가 도와줄 것이란 생각은 금물”이라고 조언했다.
이다영 프리랜서 dylee2@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