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들이 반대 뭉개고 밀어붙여”
이러한 사태의 중심엔 회의록을 전격 공개한 남재준 국정원장이 자리 잡고 있다. 남 원장은 ‘국정원 명예’를 위해 독자적으로 판단, 회의록을 공개했다고 밝혔다. 청와대 역시 남 원장과는 선을 긋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일요신문>은 남 원장 ‘결단’ 뒤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정황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지난달 25일 국회 정보위에 출석하기 위해 남재준 국정원장이 국회에 들어서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지난해 대선 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발언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자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 일각에서 제기됐던 논리다. 비밀기록물로 돼 있는 회의록을 일반기록물로 바꾸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논리였다.
박근혜 캠프에서 이러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은 회의록이 공개될 경우 선거에 유리하게 영향을 미칠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박근혜 캠프가 회의록 내용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거나 이미 확보했을 가능성과도 맞물린다. 야권의 한 중진 의원은 “여러 정황상 국정원이 이른바 여직원 댓글 사건과 마찬가지로 회의록을 통해 선거에 개입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란 강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의록 공개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박근혜 캠프 출신 여권 인사는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공개할 경우 득이 될지 실이 될지 계산이 안 된다고 들었다. 그래서 최후의 비상수단 정도로 남겨 뒀다”고 전했다. 당시 박근혜 캠프 주변에서는 핵심 측근들이 회의록과 관련된 대책을 여러 차례 논의했다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회의록 공개 논란이 본격적으로 재점화된 것은 6월 20일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을 비롯한 새누리당 정보위원 5명이 회의록 발췌본을 열람하면서부터다. 이에 대해 민주당은 열람을 허가한 남 원장 등을 검찰에 고발했고, 남 원장은 회의록 등급을 바꾸며 전문을 공개하는 초강수를 택했다. 그러자 야권은 회의록 공개에 대해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과 관련한 국정조사를 앞두고 국면을 전환하기 위한 ‘꼼수’라며 강력히 반발했다.
회의록 공개를 놓고 파문이 커지자 남 원장은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한 것”이라면서 “제가 승인했다. 독자적으로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청와대 역시 선을 긋고 나섰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기자들에게 “청와대가 허락할 문제가 아니다. 공개 책임은 국정원이 진다”며 일축했다. 허태열 비서실장, 김장수 국가안보실장 등 청와대 핵심실세들도 “언론보도를 통해 회의록 공개 사실을 알았다”고까지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야권은 남 원장과 박 대통령 사이에 사전 교감이 있었을 것이라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남 원장이 청와대의 지시나 허락 없이 했을까요. 그렇다면 국정원장은 해임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여권에서도 남 원장의 독자행동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익명을 요구한 친박계 한 의원은 “남 원장이 전형적인 군인 스타일이라는 건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런데 직속상관이라고 할 수 있는 박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회의록을 공개했을 리는 없다”면서 “아니면 박 대통령 최측근인 김장수 실장과 긴밀한 협의를 거쳤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박 대통령 후보 시절 국방안보특보 임명장을 받는 모습. 박은숙 기자
앞서 허태열 비서실장도 21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해 “공공기록물관리법에 따르면 (회의록은) 대통령기록물이 아니다”라며 회의록 공개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다.
남 원장이 박 대통령 방중을 앞둔 24일을 회의록 공개 ‘D-DAY’로 잡았다는 점도 청와대 개입설을 부추기고 있다. 윤호석 정치컨설턴트는 “미국을 방문할 때는 ‘윤창중 성추행’ 사건으로 인해 모든 성과가 묻혔다. 어차피 공개될 것이라면 출국 전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한 박 대통령이 중국 일정을 소화하는 모습을 노출시켜 ‘회의록 공개와는 무관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려 했다는 관측도 나온다.
여권 복수의 관계자들에 따르면 남 원장이 회의록을 공개하는 과정에 관여한 인사들은 극히 소수인 것으로 전해진다. 회의록 공개 이후 여권 내부에서조차 부정적인 견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방증하고 있다. 이와 관련,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신뢰하는 일부 원로 인사들이 공개를 주도했다.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이들이 밀어붙였고, 남 원장과 김장수 실장이 동조했다. 박 대통령이 이들의 손을 들어줬을 것”이라고 전했다. 회의록 공개를 이끈 원로들은 지난 2007년 대선 경선 때부터 박 대통령을 적극 지원한 인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남 원장을 포함한 여권 핵심부는 엄청난 정치적 파장을 예단하면서도 왜 회의록 공개를 밀어붙였을까. 이에 대해 앞서 언급한 원로 인사 중 한 명의 측근은 ‘위기감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야권이 국정원 국정조사를 통해 지난 대선을 불법으로 몰고 가려 했다. 여기서 밀리면 정권 자체가 위험하다는 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안다”면서 “이에 맞서기 위한 전략으로 떠오른 게 바로 회의록 공개였다. 우리로서는 히든카드를 쓴 것”이라고 전했다.
그동안 박 대통령이 회의록 공개에 문제가 없다는 인식을 보여 왔다는 점도 이들이 강경한 목소리를 낸 배경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12월 15일 유세에서 “참여정부가 정말 안보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데 유능했다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 시 NLL 발언을 공개해서 확인하면 된다”며 “남북정상 회의록 공개를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은 바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