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눈부시지만 우린 눈물겹다‘’
▲ 이명박 대통령이 대기업 CEO 때 익힌 습관으로 참모들도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5월 31일 한국-아세안 특별정상회의 CEO SUMMIT 개회식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는 이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 대통령의 밤늦은 귀국에 한국서 청와대를 지키던 정정길 대통령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참모들도 서울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월화수목금금금’의 청와대라고는 하지만 참모들 입장에선 여느 평일보다 더 긴장된 하루를 보낸 셈이다.
동행 취재에 나섰던 기자들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밤늦게 귀국한다고 해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이슈가 집중되는 청와대 기자실을 비워둘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에 해외 순방이 끝나면 청와대 기자단이 상주해 있는 춘추관에선 여독과 시차에 적응하지 못해 병든 닭처럼 졸고 있는 기자들이 어렵지 않게 목격된다.
이 대통령은 귀국 다음날인 26일, 아침 8시부터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고 오후 한·불가리아 정상회담과 이어진 파르바노프 불가리아 대통령 내외를 위한 국빈만찬도 가졌다. 이 대통령의 순방에 동행한 청와대 참모라면 불과 몇 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청와대에 나와 이 같은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한 셈이다.
물론 이 대통령의 휴일 밤늦은 귀국은 이번만이 아니다. 국제회의가 주말을 이용해서 열린다고는 하지만 올해 이 대통령의 해외 순방 절반 이상이 ‘휴일 밤 귀국’이다. 그게 아니면 주말을 이용해 출국하거나 일본, 중국 방문의 경우 1박 2일 또는 당일치기 방문이 주를 이룬다.
올해 첫 해외 방문인 지난 3월 남태평양 3개국 순방 때에도 이 대통령은 일요일, 해가 진 저녁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4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참석차 영국을 방문했을 땐 토요일 오전에 도착했으며 5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순방은 일요일에 출국했다. 7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선진 8개국(G8) 참석과 폴란드·스웨덴 순방은 주말이 끼었고, 9월 미국 출장 땐 일요일 오후 출국했다. 이는 전직 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때와 사뭇 다른 것으로 김 전 대통령 때는 해외 순방 일정이 많지 않았고 노 전 대통령 때는 귀국할 때 하루 정도 숨을 돌릴 수 있는 일정을 잡았다고 한다.
이 대통령이 이처럼 숨 가쁘게 주말을 이용해 해외 순방에 나서는 것은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때 익힌 습관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 측근들에게 “CEO가 회사를 비우면 생산성이 확 떨어지더라”며 자신의 경험을 털어놨다고 한다. CEO일 때 자리를 비워 생산성이 낮아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해외 체류 기간을 줄이고 토요일, 일요일을 껴서 출장 일정을 짠 것이 대통령 때까지 이어진 셈이다.
이 대통령의 CEO 경험에 바탕을 둔 이 같은 기업가적 마인드는 국정 운영에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청와대 경제수석실 산하 이 아무개 비서관은 업무영역 갈등 문제로 상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청와대 직원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등의 소동을 빚었고, 비슷한 시기 방송통신비서관실 박 아무개 행정관은 이동통신사 임원들을 불러 기금 출연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 대통령은 이 같은 사건이 발생한 직후 “비서관이든 행정관이든 청와대 직원들의 불미스러운 행동은 대통령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면서 “특히 위계질서를 어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엄중한 행정적 징계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박 행정관은 청와대에서 일하기 전 근무했던 방송통신위원회로 ‘원대복귀’했고 이 비서관은 서면경고를 받는 데 그쳤다. 세간의 예측과는 전혀 반대로 결론이 난 셈이다. 당초 소동을 피운 비서관은 청와대를 떠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방통위 업무의 연장선상에서 대기업 임원을 청와대로 불렀던 행정관이 청와대를 떠난 것이다.
즉, 이 비서관의 넘치는 열정(?)보다는 대기업 임원을 함부로 오라 가라 한 박 행정관의 ‘간 큰 행동’이 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으로 결론이 난 셈이다.
기업들도 이 대통령의 기업가적 마인드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이 대통령이 기업들 앞에 서면 기업가적 마인드가 아닌 ‘기업가 경험’이 먼저 나와 기업들을 불편하게 한다. 최근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서민 대상 소액대출사업인 미소금융에 재벌 기업들이 출연금 500억∼3000억 원씩을 내놓기로 했다. 대기업이 1조 원, 금융권이 1조 원씩 10년간 2조 원을 조성한다. 기업의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 대통령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데 재벌 기업들은 ‘겉으로 웃을 수밖에’ 없다.
정부의 국가 온실가스 감축 중기 목표에 대해서도 기업들의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부는 당초보다 강화된 ‘오는 2020년까지 2005년 대비 4% 감축하는 것’을 유력한 방안으로 제시했다. 이에 저탄소 녹색성장을 위해 온실가스 감축은 피할 수 없는 과제지만 당장 원가상승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됐다. 이 대통령은 기업들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말하면서도 오히려 분발을 촉구했다.
이 대통령은 “재계에서는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세우는 것을 상당히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목표는 약간은 이상적인 것으로 두고 거기 따라가는 것이 좋다”면서 “목표를 낮추면 인식을 바꾸는 게 어렵다. 목표를 이상적으로 해 놓으면 거기를 향해서 가는 데 도움이 된다. 정부도 성장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 노력을 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최근 이 대통령 주변에 그의 ‘CEO 본색’을 불편해하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는 듯하다.
전용기 파이낸셜뉴스 기자 courage@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