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랬다 저랬다’에 ‘쇼하나’ ‘생각대로 해’
▲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010강제통합 재검토설은 지난 11월 말 일부 언론을 통해 흘러나왔다. 주요 내용은 방통위가 010 통합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전면 재검토로 방향을 선회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문이 확산되자 방통위 실무 관계자는 “재검토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통신환경이 바뀌었으니 좀 더 신중하게 결정할 것이란 의미였다”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어찌 됐든 그동안 010으로 통합되는 줄 알고 휴대폰 번호를 교환한 소비자들과 010 마케팅에 총력을 기울여온 통신사들이 있어 그들의 피해를 고려했을 때 번복하기는 곤란하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하며 강제통합이 애초 예상대로 이루어질 것이란 쪽에 무게를 실었지만 ‘여지’는 남아 있는 셈이다.
갑작스러운 방통위의 ‘신중함’에 내년 3월쯤 통합을 준비하던 이동통신 3사의 희비가 엇갈렸다. 그중 010 가입자 유치에 총력을 기울여 온 KT의 속사정은 가장 복잡해 보인다. 지난 2003년 강제통합 계획안 발표 당시 통신업계에선 “011의 힘에 눌려 맥을 못 추던 KTF(현 KT)를 살리려는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010 통합은 이동통신시장 절대강자 SK텔레콤의 최고 무기 011을 없애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 게다가 당시 이상철 정보통신부 장관은 KT 사장 출신이었다.
이후 KTF는 ‘쇼’(Show)를 전면에 내세우며 3세대 가입자 유치에 총력을 기울여 현재 자사 가입자 중 010이 88.8%로 업계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KT 입장에선 이제 남은 11%의 2세대 가입자들을 정부가 010으로 통합해주기만 하면 2세대 유지에 들어가는 막대한 유지비용을 ‘3세대 전쟁’으로 돌릴 수 있다. KT 관계자는 “2세대 유지에 상당한 액수가 드는 것이 사실”이라며 “옛 번호를 지키려는 고객들에게 두 번호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부가서비스를 제공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KT의 ‘3세대+01× 유지 방법’에 대해 방통위의 승인이 떨어질지는 미지수다. 번호자원회수를 위해 3세대부터는 010만 쓰도록 한 것인데 기존 번호를 그대로 가지고 있겠다는 것은 다른 통신사와의 형평성에서 어긋나기 때문이다.
KT의 최대 라이벌 SK텔레콤은 강제통합이 이뤄지면 역사 속에 사라질 ‘스피드 011’에 대한 아쉬움이 깊게 자리하고 있는 표정이다. SK텔레콤 측은 ‘010 강제통합’은 정통부 시절부터 이어져 온 KT의 편의 봐주기라고 주장한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오랜 시간 투자해서 애지중지 011 브랜드 가치를 키워 놨더니 번호이동정책으로 나눠 쓰라 한 것도 그렇고, 이번 010 강제통합을 추진코자 하는 배경 역시 KT 편들어주기”라는 해석이다.
이 SK텔레콤 관계자는 “KT가 2세대 망을 얼른 철수하고 싶어하는 것은 유지비용 때문이 아니라 LG텔레콤 때문”이라는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KT의 경우 2세대 시절 높은 기지국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LG텔레콤과 로밍계약을 맺어 기지국을 공유해 왔다. 3세대로 접어들면서 기지국과 주파수대역이 완전히 달라짐에 따라 KT로서는 2세대 망을 위한 설비는 필요가 없어져 철수해도 상관이 없는 상황. 반면 LG텔레콤은 기존의 2세대 기지국을 통해 3세대 망을 사용하고 있어 2세대 기지국이 여전히 필요하다.
SK텔레콤 관계자의 진단은 LG텔레콤이 ‘오즈’(OZ)로 선전하고 있는 이때 KT로서는 함께 쓰는 2세대 기지국을 철수해 LG텔레콤의 통화품질에 타격이 가길 바라는 것이 그 속내라는 주장이다. 이런 관측은 최근 ‘영원한 KT맨’일 줄 알았던 이상철 전 정통부 장관이 돌연 ‘LG 3콤’(텔레콤-파워콤-데이콤 합병법인) 최고경영자(CEO)로 내정돼 KT-LG텔레콤이 묘한 긴장상태가 되면서 힘을 받는다. KT로선 이 전 장관이 돌연 경쟁사로 갔다는 소식도 놀라운 이슈인데 난데없이 ‘010 강제통합 재검토설’까지 흘러나오는 것은 뭔가 불길한 기류인 셈이다.
이렇게 KT의 ‘견제’를 받는 것으로 비쳐지는 LG텔레콤은 상대적으로 느긋한 반응을 보였다. LG텔레콤 관계자는 “011의 브랜드 독점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강제통합이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LG텔레콤에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KT와 맺은 2세대 기지국 공유 계약에 관해서는 “멀티모드기지국이라는 새로운 설비를 마련했다”며 “KT가 2세대 기지국을 지금 당장 철수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답했다.
사실 LG텔레콤이 이렇게 느긋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KT와 SK텔레콤의 경쟁구도 아래서 이득을 본 측면도 있기 때문. 3세대에 오며 경쟁이 과열되자 SK텔레콤과 KT는 ‘공짜폰’을 시중에 내놓는 등 무리한 마케팅을 벌였다. 이를 지켜보던 LG텔레콤은 두 통신사의 과열된 마케팅을 방통위에 신고, 가입 후 3개월 동안 번호이동을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제도가 도입됐다.
이렇게 두 통신사의 가입자 늘리기에 브레이크가 걸렸을 때 LG텔레콤은 지속적인 2세대 단말기를 내놨다. 타 통신사는 2세대와 3세대에 다른 주파수대역과 기지국을 사용해 어느 한 쪽에 투자를 집중하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였지만 LG텔레콤은 기존 기지국을 업그레이드시켜 3세대 망을 쓰다 보니 2세대에 대한 투자를 줄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 2세대 단말기를 구입하려는 소비자와 기존의 01× 번호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고객들이 2세대 휴대폰을 꾸준히 생산하는 LG텔레콤으로 몰렸다. LG텔레콤에 따르면 실제 지난 2월 자사 가입자가 크게 늘었는데 이들 중 40%가량이 번호 이동 고객들이었다고 한다.
한편 소비자들은 010 강제통합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도 내고 있다. 01× 번호를 소유하고 있는 소비자들은 인터넷에 ‘안티 010’ 카페를 만들어 ‘정부가 사유재산인 휴대전화 번호를 강제로 통합하려 한다’며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YMCA와 녹색소비자연대 역시 “정부가 번호통합을 시행한다는 것은 통신사들의 이해관계에 얽혀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침해하는 정책 남용”이라며 방통위에 성명서를 제출했다. 통신업계 안팎을 달구는 ‘010 강제통합’ 문제는 앞으로도 논란의 도마 위에서 쉽게 내려오지 않을 듯하다.
손지원 인턴기자 snorkle@par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