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고 거리 활보… 누가 그를 망가트렸나
할리우드가 예전부터 이토록 편견 없이 자유로운 땅은 아니었다. 자유주의의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하던 1960년대에 와서야 그곳에서도 커밍아웃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그 전엔 미국 땅에, 그리고 할리우드에 게이나 레즈비언이 없었던 걸까? 그럴 리 없다. 지난주에 다루었던 록 허드슨처럼 보수적인 사회 속에서 감춰졌을 뿐이다.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죽은 후에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작은 사진은 그의 연인이었던 말론 브란도(오른쪽).
그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그 근원은 어머니였다. 뼈대 있는 집안의 서출이었던 에델 클리프트는 자신이 명문가의 일원이라는 사실과 자신의 귀족스러움을 끊임없이 인식하고 증명하는 데 삶의 대부분을 바쳤다. 그녀는 자신의 그러한 욕망을 자식들에게도 투영했고,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독특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건 그런 이유였다. 어머니는 항상 자녀들을 데리고 유럽 여행을 다녔고, 몽고메리에게 집은 수시로 바뀌는 호텔 방이었다.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었던 그는 학교도 다니지 못했고, 모든 것을 가정 학습으로 해결했다. 이때 한 가정교사의 소개로 연극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15세에 브로드웨이에 진출해 승승장구했던 클리프트. 그는 스무 살이 되자 집을 나와 어머니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에겐 여전히 ‘어머니 같은 존재’가 필요했다. 이때 만난 리비 홀만이라는 여배우는 무려 16세 연상. ‘두 번째 어머니’나 마찬가지였던 그녀는 클리프트의 일거수일투족을 간섭했다. 그에게 캐스팅 제의가 들어오면 그녀가 출연 여부를 결정할 정도였다(그리고 그녀는 레즈비언이었다). 이후 영화로 진출해 스타덤에 오른 클리프트는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오스카 후보에 네 번 올랐지만 단 한 번도 시상식장에 가지 않았을 정도였다. 외톨이였던 그에게 유일한 친구가 있었다면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들은 영혼을 나눈 사이와도 같았고, 세 편의 영화에서 함께했으며 테일러는 한때 클리프트와 결혼할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이뤄지지 않았다. 클리프트는 게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말이다.
이후 그는 알코올중독에 빠졌고 음주 운전 사고로 코뼈와 턱뼈가 부서졌으며 왼쪽 얼굴이 찢어졌다. 다행히 부러진 이빨이 목구멍에 박혀 기도를 유지해서 가까스로 질식사를 면할 수 있었지만 배우로선 치명적인 안면 마비 증상을 겪었고, 사고 후유증과 날로 늘어가는 술과 마약은 점점 그의 육신을 좀먹었다. 젊은 날에 이질을 앓았던 그에겐 알레르기와 대장염이라는 지병이 있었고, 몇 년 후에는 백내장으로 시력마저 위험해졌으며 심한 관절염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의 추락을 자초했고 모든 면에서 망가져갔다.
그렇다면 그토록 재능 있고 아름다운 인간이 왜 그렇게 자기 파괴적인 길을 걸어야만 했을까? 그 원인은 그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했던 보수적 미국 사회였다. 동성애가 정신 질환으로 분류되던 시기,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결코 드러낼 수 없었다. 여기에 그의 삶을 지배했던, 괴물 같은 어머니의 영향력은 그의 내면 한구석을 영원히 유아적 상태로 남아 있도록 만들었다. 그의 모든 것은 어머니가, 혹은 리비 홀만 같은 모성적 존재가 결정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 자신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결국은 찾지 못했던 것 같다.
술에 취해 거리에서 벌거벗고 뛰어다니다 경찰에 붙잡힐 정도로 망가졌던 클리프트. 그는 1966년 7월 23일 아침 관상동맥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46세의 나이였다.
“나의 삶엔 항상 칼이 겨눠져 있었다”라고 말했던 몽고메리 클리프트. 그의 연인은 <이유 없는 반항>의 살 미네오, 록 허드슨의 에이전트였던 헨리 윌슨, 위대한 무용가였던 제롬 로빈슨 그리고 고향(네브래스카의 오마하) 후배인 말론 브란도였다. 다음 주엔 할리우드 사상 가장 위대한 배우였던 말론 브란도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