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삼성’ 인재관리 시스템에 ‘구멍’?
▲ 삼성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잘나가는 삼성전자 부사장이 업무 스트레스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의 모습이 더 날 서 보인다. | ||
강남경찰서에 따르면 지난 1월 26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모 아파트 화단에 피를 흘린 채 숨을 거둔 이 부사장을 아파트 경비원이 발견해 신고했다고 한다. 경찰은 이 부사장이 자택인 아파트 4층에서 투신해 숨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부사장은 삼성 반도체 신화 주역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는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석사,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를 거쳐 일본 통신업체인 NTT에서 근무하다 1992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그는 이후 줄곧 플래시메모리분야 연구개발에 몸담았으며 2007년 초 인사를 통해 삼성전자 핵심인 반도체 메모리사업부 연구소장직에 올랐다.
이 부사장은 지난 2006년 말 삼성전자 최고의 명예직인 ‘삼성펠로’에 선정됐다. 삼성펠로는 삼성이 지난 2002년부터 해당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으면서 그룹 사업에 큰 공헌을 한 핵심 기술인력에게 수여해온 명예직이다. 삼성펠로에겐 연간 10억 원의 연구비와 본인 명의 단독 연구실, 연구지원팀 등이 제공된다. 2002년 도입 이후 삼성펠로에 선정된 인사는 지금까지 단 13명뿐이다.
이렇듯 승승장구해온 이 부사장 신변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지난해 초 정기인사를 통해서다. 비메모리를 다루는 시스템LSI개발실장(기흥공장장)으로 발령받으면서 자신의 전문분야인 메모리사업부를 떠나게 된 것이다.
지난해 초 인사에서 삼성전자는 젊은 임원들을 대거 핵심 보직에 전진배치시켰다. 2008년 삼성전자 실적이 전년에 비해 하락한 것이 이 부사장을 비롯한 기존 터줏대감들의 연쇄이동을 부른 것이다. 그런데 이 부사장 보직 이동에 관한 다른 관측도 제기된다. 이 부사장은 ‘반도체 메모리 용량이 1년마다 두 배씩 늘어난다’는, 이른바 ‘황의 법칙’으로 유명한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이 아낀 인사로 알려져 있다. 황 전 사장은 삼성전자 입사 전 이 부사장이 박사학위를 받은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전기공학과 책임연구원을 지낸 바 있다.
그런데 황 전 사장은 지난해 초 인사에서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의 아들 이재용 부사장 시대를 열어젖히기 위한 세대교체 바람 속에 기술총괄 사장직에서 물러나 상담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 전 사장이 퇴진하면서 스탠퍼드 학맥인 이 부사장 입지에도 변화가 온 것으로 풀이되기도 했다. 그룹 내 몇 안 되는 삼성펠로였던 데다 1951년생으로 지난해 인사 당시 50세에 불과했던 이 부사장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에 대해 이런저런 추측들이 제기되고 있다.
경찰조사에 따르면 이 부사장은 지난해 초 인사를 통해 비메모리 분야로 옮기면서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이 부사장의 부인이 경찰조사 과정에서 “남편이 안 마시던 술을 자주 마시고 들어왔다”는 진술까지 했다고 한다. 이 부사장은 투신하기 전 부서 이동과 업무 압박에 따른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유서를 남겼다고도 전해진다.
이 부사장 사망과 관련해 삼성 측은 “안타깝다”면서도 “세간에 오해가 좀 있는 것 같다”는 입장이다. 반도체 연구소장으로 있다가 기흥공장장으로 간 것에 대해 삼성 관계자는 “좌천으로 볼 수 있는 인사가 절대 아니었다”고 밝힌다. 공장장은 보통 사장급이 맡는데 이 부사장이 그 자리를 맡았으니 좌천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부사장이 줄곧 맡아온 메모리 분야에서 비메모리 분야로 간 것에 대해 삼성 측은 “삼성이 메모리는 세계 1위지만 비메모리는 다른 기업에 뒤져 있다”며 “비메모리에 대해 회사에서 지난해부터 투자를 집중적으로 늘려왔으며 이 부사장을 투입해 그 분야를 키워보려 했던 것”이라 밝혔다. 삼성 관계자는 “그룹 내에서 이 부사장은 ‘장차 반도체 메모리 분야에서 사장으로 키워야 할 인물’이란 평을 받아왔는데 경험을 넓혀주기 위해 다른 분야로 발령 낸 것”이라고 덧붙였다.
삼성 안팎에선 이 부사장의 사망이 단지 업무상 스트레스에 의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제기된다. 삼성 측 주장대로 “키워주기 위한 인사”였다면 부서 이동으로 인한 압박감 외에 다른 데서 자살 원인을 찾아야 하는 셈이기도 하다.
그런데 특별히 눈에 띄는 구석이 없다. 외부에서 반도체 신화 주역으로 높이 평가받던 이 부사장은 내부에서도 신망이 높았다. 이 부사장이 맡았던 부서는 항상 사내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회사 축제 때 젊은 부서원들과 함께 손잡고 춤을 추며 어울리는 모습도 곧잘 보이는 등 업무 외적인 면에서도 평판은 좋았다고 전해진다. 이 부사장 집안에 특별히 문제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 바가 없다.
이 부사장에게서 금전적인 문제를 찾아보기도 현재로선 어렵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나타난 지난해 3분기 삼성전자 분기보고서엔 이 부사장이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을 통해 삼성전자 주식 9479주를 갖고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1월 28일 삼성전자 주가 77만 6000원으로 환산하면 73억여 원에 이른다. 연간 급여도 수십억 원에 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로선 직장 내 문제 외에 다른 원인을 찾아보기 어려운 셈이다.
항간에는 이 부사장이 겪었을지도 모르는 회사 관련 업무 외적 스트레스에 초점을 맞추기도 한다. 그동안 재계에선 삼성 내부 사안을 외부에 알렸다고 의심받는 임직원이 수사당국 조사에 준할 정도의 강도 높은 내부 감사를 받으며 압박감에 시달렸다는 사례가 종종 전해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이 부사장에겐 전혀 가능성 없는 이야기”라며 “인품도 훌륭하고 말씀도 많이 하시는 편이 아니며 술자리도 자주 갖지 않는 분이셨다”고 밝힌다.
이 부사장 자살이 직장 내부 문제였는지 여부를 떠나 이번 사태를 ‘관리의 삼성’으로 대변돼온 삼성그룹 인재관리 시스템의 허점이 드러난 사례로 보는 시각이 늘고 있다. 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올려놓는 데 큰 공헌을 했음에도 좋지 않은 모습으로 퇴사한 사례도 최근 몇 년간 종종 들려왔다. ‘선배’들의 이 같은 모습에 자극받아 중간간부 시기에 다른 대기업으로 이직한 인사들도 제법 볼 수 있다. 삼성 안팎에선 이번 사태를 통해 조직 내부의 사람관리 체계가 근본적 변화를 맞을 수도 있다는 관측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