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짓기’도 하기 전 ‘주도권’ 다툼
▲ 강정원 국민은행장,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 민유성 산은지주 회장 | ||
최근 재점화된 메가뱅크 논의엔 국내 은행들의 합병을 통한 대형화로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논리가 깔려 있는 동시에 금융지주사 CEO(최고경영자)들 개인의 정치적 계산도 담겨 있는 듯하다. 금융권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고 있는 메가뱅크 논의 속으로 들어가 본다.
국내에서 ‘메가뱅크’란 단어가 화제에 오르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8년 현 정부 출범 직후부터다. 당시 정부 안팎에선 산업은행과 우리금융, 그리고 기업은행을 합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초대형 은행으로 키운다는 구상이 나돌았지만 곧이어 터진 글로벌 금융 위기로 빛이 바랬다. 그런데 최근 들어 우리금융에 대한 민영화 방안이 6월 지방선거 이후 구체화할 것이란 전망 아래 은행권 M&A(인수·합병) 시나리오가 난무하면서 메가뱅크론도 다시 힘을 얻게 됐다. 무엇보다도 현 정부 초기 메가뱅크론을 설파했던 최중경 전 기획재정부 제1차관이 최근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되면서 메가뱅크 논의에 다시 불이 붙고 있다.
‘정부(예금보험공사) 소유인 우리금융과 국책은행이었던 산업은행을 민영화하면서 시중은행과 합병해 세계적인 메가뱅크를 만든다’는 것이 최근 나도는 메가뱅크론의 핵심. 아직까지 정부가 직접 나서 메가뱅크 설립을 언급하진 않고 있지만 대형 금융지주사 CEO들이 메가뱅크의 주체로 적극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인사는 지난 연말 KB금융 차기 회장 선출 불발 직후 대외활동을 자제해온 강정원 국민은행장이다. 그가 최근 다시 전면에 나서 메가뱅크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강 행장은 지난 2일 월례조회를 통해 “한국 금융산업의 재도약을 위한 메가뱅크가 현실화할 경우 KB국민은행이 주도적 역할을 하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같은 날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도 창립 9주년 기념사를 통해 “민영화와 금융산업 재편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더라도 우리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우리금융 민영화 과정이 다른 금융사와 합병하는 결과를 낳더라도 통합 법인의 주도권을 쥐겠다는 의지의 피력인 셈이다.
지난 1일 산업은행 56주년 창립기념식에서 민유성 산은지주 회장 겸 산업은행장은 “앞으로 글로벌 금융 지형을 바꾸는 세계 금융의 큰 산으로 일어설 것”이라 밝혔다. 글로벌 경쟁에 맞설 대형 M&A의 주체가 되자는 뜻으로 풀이된다. 지난 1일 김정태 하나은행장도 직원조회에서 “7월 이후 은행권 M&A 윤곽이 구체화될 것”이라며 대형 M&A 준비에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이들 금융지주사 수장들이 앞 다퉈 메가뱅크 주체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것은 6월 지방선거 이후 본격화될 우리금융 민영화 과정에서의 주도권 경쟁을 의미한다. 이 결과는 각 CEO들의 위상에도 작지 않은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지난해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 사임 이후 단독 회장 후보로 추천됐다가 금융당국과 갈등설 속에 스스로 사퇴한 바 있다. 올 초 KB금융과 국민은행이 금융감독원의 강도 높은 종합검사를 받을 때 강 행장 개인에 대한 조사도 이뤄졌다고 전해진다. 강 행장은 “(오는 10월까지) 임기를 채우겠다”며 거취 논란을 잠재웠지만 조만간 KB금융 회장후보추천위원회(회추위)가 구성될 것으로 보여 강 행장 향후 입지에도 영향을 미칠 듯하다.
지난해 KB금융은 총자산 317조 원을 기록하면서 지난 2001년 주택은행 합병 이후 지켜온 1위 자리를 우리금융(318조 원)에 내주고 말았다. KB금융의 지난해 순이익도 2008년 1조 8733억 원에서 무려 71%나 쪼그라든 5398억 원을 기록해 신한금융(1조 3050억 원), 우리금융(1조 260억 원), 외환은행(8917억 원), 기업은행(7105억 원)에 이은 5위에 그쳤다. 강 행장에게 M&A 성공과 메가뱅크 주체로 서는 일은 빼앗긴 ‘리딩 뱅크’의 위상을 되찾는 동시에 일련의 사태로 구겨진 개인적 명예를 회복할 기회인 셈이다.
KB금융과는 대조적으로 이팔성 회장의 우리금융은 지난해 기준 총자산 순위에서 KB금융을 앞지르고 1위에 올라서면서 분위기가 고조돼 있다. 민영화 추진으로 우리금융 지분이 매물로 나올 것으로 보이지만 타 은행과의 합병이 이뤄질 경우 ‘주’가 되면 됐지 ‘객’은 절대 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한때 ‘낙하산’ 논란을 낳기도 했던 이팔성 회장이 다가오는 대형 M&A전에서 주도권을 쥐느냐 마느냐에 따라 금융권에서의 롱런 여부가 가려질 전망이다.
지난해 민영화를 선언한 산은지주의 민유성 회장도 대형 M&A전을 앞두고 초조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산업은행은 지난해 10월 55년간의 국책은행 역사를 마감하고 산은지주와 정책금융공사로 분리하며 민영화 첫 걸음을 뗐다. 산은지주는 글로벌 CIB(상업투자은행)를 지향했지만 지난해 말부터 야심차게 추진해온 태국 시암씨티은행(SCIB) 인수 건에 대해 “인수 조건 중에 산은에 불리한 게 있었다”는 이유로 중도 포기하는 등 난항을 겪고 있다. 국내 시중은행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영업망 확충이 필요한 산은지주는 곧 매물로 나올 우리금융이나 외환은행을 상대로 한 M&A 성공을 발판 삼아 몸집 불리기에 나설 전망이다.
향후 벌어질 금융권 대형 M&A가 금융지주사 CEO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개될 가능성 또한 있다.
최중경 신임 경제수석 뒤엔 그가 기획재정부 제1차관 시절 장관으로 모셨던 강만수 대통령 경제특보 겸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이 버티고 있는 것으로 관측된다. 메가뱅크 신봉자인 최중경-강만수, ‘최강라인’에 대한 이 대통령의 신뢰가 두터운 만큼 금융권 M&A가 정부 주도 아래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황영기 전 회장 퇴진 이후 공석인 KB금융 회장 자리에 ‘MB계’ 낙하산 인사가 내려올 것이란 이야기도 여전히 나돌고 있다. 정부 소유의 우리금융과 국책은행이었던 산은지주에 대한 정부의 입김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일각에선 강정원 국민은행장이 골치 아픈 메가뱅크 시나리오를 피해 외환은행 인수를 통한 몸집 불리기에 나설 가능성도 거론된다. 외환은행 자산규모는 108조 원으로 KB금융의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지난해 당기순이익 8917억 원을 기록해 KB금융(5398억 원)을 앞섰을 만큼 내실이 있다는 평가다. 적어도 3개 이상의 대형 은행이 합해야 세계 30~40위권 메가뱅크 탄생이 가능한 상태에서 이를 둘러싼 금융지주들과 대형 은행 그리고 정부당국이 어떤 행보를 취할지에 금융권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