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원래 고스톱에는 이러한 룰이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독박’이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 또한 ‘싹쓸이’가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에 생겨났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권력을 쥐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을 풍자한 고스톱의 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진 셈이다.
또다시 ‘고스톱’의 시즌이 돌아왔다. 고스톱 문화가 특별히 계절을 탈 리는 없지만, 그래도 추석과 같은 명절에는 늘 고스톱 판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있는 이번 추석에는 이회창 노무현 정몽준 등 대선후보들이 고스톱의 주요 풍자 대상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실제로 3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선 때문인지 이미 ‘꾼’들 사이에선 ‘이회창 고스톱’과 ‘노무현 고스톱’ 등이 퍼지고 있다. ‘이회창 고스톱’의 화두는 ‘못 먹어도 고!’. 즉 한 번 ‘고’를 외치면 판이 끝날 때까지 ‘스톱’을 할 수 없다는 게 원칙이다.
온갖 ‘역경’에도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두 차례나 대선에 나서는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의 행보에 대한 은근한 풍자가 깔려 있다. ‘창 고스톱’의 세부적인 룰은 화투 패 2자(매조)를 기준으로 삼는다. 2자 패 4장은 이 후보 일가를 상징한다. 성이 ‘이’씨라는 점도 있고, 이번이 두 번째 대선 도전이라는 뜻도 담겨 있다.
누군가가 2자 패 4장을 다 차지하고 게임을 이기면 점수가 5점 가산된다. 하지만 만약 한 장도 못먹고 점수가 나면 오히려 ‘독박’을 쓰게 된다. ‘아들’을 상징하는 2자 껍데기 패 두 장을 다 못먹어도 역시 독박. 두 아들의 병역비리의혹을 룰에 접목시킨 셈이다.
‘노무현 고스톱’의 특징은 한마디로 ‘흔들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같은 패 3장이 한꺼번에 들어오면 ‘흔들기’를 하는데, 여기서는 ‘따따블’(4배)로 쳐준다. 민주당 국민경선에 의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고도 여전히 후보 위치가 흔들리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빗댄 것이다.
반면 ‘노 후보 흔들기’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반영하는 또 다른 버전의 ‘노무현 고스톱’에선 고스톱판에서 아예 흔들기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제3후보로 거론되는 정몽준 의원을 모델로 한 이른바 ‘몽 고스톱’도 최근 인터넷 등을 통해 떠오르고 있다.
‘몽’을 상징하는 11자(동)의 ‘동광’ 패를 먹으면 이른바 ‘꿈은 이루어지게’ 되는 셈. 동광 한 장에 3점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만약 ‘비광’패까지 곁들이면 5점으로 뛴다.
‘비광’은 월드컵 때 한창 유행했던 ‘히딩크 고스톱’에서 히딩크 감독을 상징하는 패다. 정 의원이 히딩크 감독을 자신의 인기몰이에 이용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적 시각이 담겨 있다. 최근에 등장한 변형 ‘몽 고스톱’에선 판을 주최한 사람이 먼저 멤버들에게 판돈을 골고루 나눠주고 나서 고스톱 게임을 한다.
정 의원이 ‘신당 참여 의원들에게 국고보조금을 나눠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내비친 게 고스톱 룰에 반영된 셈이다. 대선후보의 갈지자 행보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풍자의 결정체는 ‘이인제 고스톱’. 이인제 민주당 고문의 전력을 빗대어 룰이 만들어졌다.
‘선’에게는 판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경우 판 자체를 일방적으로 깰 수 있는 ‘나가리’ 권한이 부여된다. 그러나 이 ‘나가리’ 카드는 한 번만 용인된다.
나가리 카드를 두 번이상 내밀 경우 고스톱 세계에서 강제추방한다는 벌칙이 적용된다. 지난 90년대에는 ‘3김’씨가 고스톱의 단골 메뉴였다. ‘YS 고스톱’은 4명 이상이 고스톱에 참가할 때 ‘선’에게 나머지 세 사람의 패를 볼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그리고 선은 그중에서 가장 껄끄럽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그 판에서 ‘죽을 것’을 명령할 수 있다. ‘문민독재’라는 비판을 받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독선을 풍자한 것이다. ‘DJ 고스톱’은 ‘고’를 외쳤다가 추가 점수를 내지 못해서 ‘고박’을 쓰게 될 상황이 닥쳤을 경우, ‘고’를 ‘없었던 일’로 돌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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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투장 속의 세 후보-이,노,정 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누군가가 6자(목단)와 2자, 9자(국화) 진패 3장을 먹을 경우 세 패의 숫자를 합한 17점을 나머지 두 사람에게 지불해야 하는 벌칙이 주어졌다. 6?9선언의 주체가 노 전 대통령이 아닐 것이라는 세간의 의심이 고스톱판에서도 반영됐던 것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5공 정부가 들어선 80년대는 이 땅에 풍자 고스톱 문화가 열풍처럼 번졌던 때였다.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 탓에 ‘황제 고스톱’ ‘네로 고스톱’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전두환 고스톱’의 특징은 ‘싹쓸이’. 80년 5?8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정권을 차지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 ‘싹쓸이’란 용어는 이제 완전히 하나의 고스톱 용어로 굳어졌다.
이밖에도 싹쓸이하면 오히려 자기 패를 상대방에게 빼앗겼던 ‘최규하 고스톱’, ‘고’와 ‘스톱’의 여부를 상대방에게 물어야 했던 ‘이민우 고스톱’, 또 다른 싹쓸이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김재규 고스톱’ 등도 쏟아져 나왔다.
풍자 고스톱의 효시라 할 수 있는 70년대 ‘박정희 고스톱’은 ‘독박’을 유래시켰다. 원래는 ‘쓰리 고’를 외친 다음에도 점수를 내지 못하면 그냥 그 판을 무효로 하는 것으로 끝냈으나, 박정희 고스톱에서는 다른 사람이 점수를 냈을 경우 ‘독박’이란 벌칙을 부과해서 상대방의 점수까지 대신 내줘야 했다. 이는 무리한 3선개헌을 한 박 전 대통령의 독선을 응징하고 싶어 하는 민심을 담은 것이었다.
고스톱의 풍자 범위는 정치인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사회 전반적인 현상은 모두 고스톱 풍자 문화의 그물망에 걸려들었다. 최근 김 대통령의 두 아들이 구속되면서 ‘홍3 고스톱’이 유행을 하더니 요즘에는 한술 더 떠 ‘이십팔 고스톱’이 등장했다.
이름부터 벌써 심상찮은 이 고스톱에선 대통령 가족을 상징하는 홍띠 4패(4자+5자+7자+12자)를 다 먹을 경우 이를 모두 더한 숫자인 28점이 난 것으로 친다.
하지만 홍띠 4패로 나면 광을 판 사람들의 경우 판 광의 숫자만큼 28의 배수로 돈을 물어내야 한다. 광 판 사람에게 벌칙을 부과하는 고스톱은 사상 처음인데, ‘국민의 정부’를 믿었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자고 일어나면 대형 사건이 터진다고 해서 ‘부실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썼던 문민정부에서도 ‘비자금 고스톱’ ‘삼풍 고스톱’ ‘한보 고스톱’ ‘IMF 고스톱’ 등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IMF 고스톱은 기존의 48장 외에 ‘조커’패를 다량으로 썼고, 이 조커패를 ‘쌍피’나 ‘쓰리피’로 규정하면서까지 판을 엄청나게 키웠다.
IMF로 황폐해진 주머니 사정을 고스톱으로라도 풍족하게 달래보고자 하는 심란한 민심이 담겼던 셈이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풍자 고스톱들을 들여다보면 그 시대의 민심이 진하게 녹아 있음을 알 수 있다.
70년대 중동붐이 일었을 당시 이역만리 타국에서 시름을 달래며 쳤다는 ‘사우디 고스톱’은 50대 이상 장•노년층에게 아직도 눈물겨운 향수로 남아있다. ‘사사오입 개헌’을 풍자, 5점부터는 10점으로 반올림해서 쳐주는 ‘사사오입 고스톱’도 생겨났다. 80년대에도 ‘10?6 고스톱’ ‘아웅산 고스톱’ ‘이주일 고스톱’ 등이 이어졌다.
‘고스톱 전문가’로 알려진 <고스톱 백과>(보성출판사)의 저자 시인 이호광씨는 “80년대 유행했던 전두환 고스톱, 아웅산 고스톱 등은 통제된 사회에 대한 반발감이 더하면서 실제 국민들 사이에서 널리 퍼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등장하는 신종 변형 고스톱은 직접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기보다는 고스톱을 통해 정치권에 풍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짙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감명국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