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열-이정현 ‘권력 암투’ 있었다
허태열 전 비서실장의 퇴진을 두고 이정현 수석과의 힘겨루기에서 밀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사진은 지난 4월 13일 국회 운영위 전체회의에 출석한 허 실장(왼쪽)과 이 수석.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휴가(7월 29일~8월 2일)를 마치고 돌아온 후 청와대 안팎에서는 허태열 전 실장 거취와 관련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이 공석이던 정무수석 임명과 함께 청와대 ‘2인자’ 비서실장을 바꿀 것이란 게 요지였다. 허 전 실장 교체 여부를 수소문하는 친박 의원들의 모습도 포착됐다. 이에 대해 비서실 관계자는 “(허 전 실장으로부터)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며 부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허 전 실장은 조만간 물러날 가능성이 있음을 내비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허 전 실장은 박 대통령이 휴가를 떠난 이후 측근들에게 “이 정도면 내 할 일은 다 한 것 같다”는 취지의 말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실제로 허 전 실장은 불과 몇 달 만에 몸무게가 7㎏ 빠졌을 뿐 아니라 수면 부족으로 힘들어했다는 후문이다. 청와대 개편안이 발표되던 8월 5일 아침에도 허 전 실장은 같이 근무했던 비서실 직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이제 쉬고 싶다”며 홀가분해했다.
허 전 실장 교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두 가지 관측을 내놓고 있다. 우선 허 전 실장의 자진 하차다. 허 전 실장의 원래 역할이 박 대통령 임기 초반 청와대를 ‘세팅’하는 것이었고, 어느 정도 안정기로 접어들자 허 전 실장 스스로 물러났다는 것이다. 이는 청와대가 비공식적으로 설명한 허 전 실장 교체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많지 않다. 윤호석 정치컨설턴트는 “비서실장이라는 직책의 무게감, 허 전 실장의 정치적 중량감을 감안했을 때 임명 6개월 만에 자진 하차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다음은 허 전 실장이 문책성 경질을 당했다는 것이다. 대다수 정치 전문가들은 자진 하차보다는 이런 관측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더군다나 최근 청와대 주변에선 박 대통령과 허 전 실장 간 불협화음이 새어나오고 있던 터였다. 박 대통령은 허 전 실장이 위원장으로 있는 인사위원회의 업무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허 전 실장이 ‘윤창중 사태’ ‘귀태 발언’ 등 몇몇 정치적 사건에 대한 미흡한 처리로 인해 박 대통령으로부터 신뢰를 잃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청와대와 여권 핵심부는 허 전 실장 퇴진과 관련해 말을 아끼고 있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인사는 박 대통령이 한 것이다. 우리가 뭐라고 할 성질이 아니다. 그럴 만한 사연이 있지 않겠느냐”며 답을 피했다. 친박 의원들 역시 이번 인사에 숨겨져 있는 ‘박심’을 궁금해 하면서도 “인사권자인 박 대통령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원론적인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다. 한 친박 의원은 “허 전 실장이 갑자기 나간 것에 대해 분명 내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긴 하지만 인사를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고 귀띔했다.
이런 가운데 박근혜 대선캠프 출신 여권 고위 인사는 “허 전 실장은 권력 다툼에서 패해 낙마한 것”이라고 단언해 관심을 끈다. 그는 “청와대의 공식 서열상 허 전 실장은 2인자다. 그러나 박 대통령 참모 3인방(정호성·이재만·안봉근)이나 이정현 홍보수석은 허 전 실장 못지않은 권한을 가졌다. 태생적으로 허 전 실장과 이들 사이엔 파워 게임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허 전 실장이 청와대 내 또 다른 친박 실세들의 견제로 인해 교체됐다는 얘기다.
사실 허 전 실장은 박근혜 정부 ‘개국공신’과는 거리가 멀다는 평을 받았다. 2012년 총선 공천에서 탈락했던 허 전 실장은 지난 대선 당시 캠프에서 2선으로 물러나 있었다. 허 전 실장이 초대 비서실장으로 임명되자 친박 일각에서 “숟가락만 얹으려 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왔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허 전 실장이 인사를 총괄하는 인사위원회 위원장까지 맡자 이러한 기류는 더욱 확산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6월 21일 신동우 새누리당 의원은 국회에 출석한 허 전 실장에게 “대선 캠프에 있던 사람들이 지금 입이 많이 나와 있다. 그런데도 인사가 잘 됐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며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해 미묘한 파장이 일기도 했다.
허 전 실장은 청와대 입성 초반 철저하게 몸을 낮췄던 것으로 전해진다. 허 전 실장과 친분이 두터운 한 친박 의원은 “허 전 실장은 원조 친박이긴 하지만 자신이 실세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철저하게 박 대통령 보좌에만 충실하고자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허 전 실장도 정치인 출신. 점차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청와대 내에선 이른바 ‘허태열 라인’이 늘어났다. 앞서의 친박 의원은 “(허 전 실장이) 정치 경력으로나 직책상 이정현 수석이나 박 대통령 보좌진과 싸울 군번은 아니다. 허 전 실장은 자신의 커리어에 맞게 청와대를 이끌어가려 했던 것”이라고 전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실세 중 실세로 꼽히는 이정현 수석과 허 전 실장 간 파열음이 나왔던 것도 이 무렵부터다. 허 전 실장이 이 수석과 사이가 원만하지 않은 다른 수석들을 모아 세를 키우려 하자 이 수석이 허 전 실장과 관련된 ‘X파일’을 흘리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허 전 실장은 청와대 내에서 이 수석을 비롯한 정치권 출신 인사들보다는 유민봉 국정기획수석 등 전문가·관료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놓고 여러 해석이 나온 바 있는데 ‘이정현 견제용’도 그 중 하나였다.
박 대통령 핵심 보좌진들이 자신들의 상급자인 허 전 실장을 교묘한 방법으로 ‘비토’하고 있다는 말도 돌았다. 박 대통령에게로 올라가는 모든 보고서는 1부속실이 챙긴다. 허 전 실장이나 이정현 수석도 독대를 하기 위해선 1부속실을 거쳐야 한다. 정호성 1부속 비서관을 ‘문고리 권력’으로 부르는 이유다. 1부속실이 마음만 먹으면 허 전 실장에게 불리한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박 대통령에게 올릴 수도 있다.
실제로 최근 공기업 인사가 늦어지고 있는 것과 관련해 허 전 실장의 실책이 담긴 보고서들이 박 대통령에게 건네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수석 등은 허 전 실장이 인사에서 과도한 추천권을 행사하려 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인사가 늦어지면 박 대통령 국정 운영에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그런 내용들을 박 대통령에게도 보고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반면 허 전 실장은 자신이 전권을 갖고 있는 인사 부분에 이 수석 등이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오히려 허 전 실장 측은 이 수석 등이 자신에게 인사 오퍼를 했다가 거절당하자 험담을 하고 다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고 한다. 몇몇 친박 의원들 역시 “허 전 실장이 인사 과정에서 이 수석 등 실세들의 청탁을 완전 배제한 게 갈등의 원인일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밖에 허 전 실장과 이 수석 등은 주요 정치적 사안마다 의견이 엇갈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권력 핵심부에서 벌어졌던 파워 게임에서 허 전 실장은 패했다. 정치 전문가들은 이 대목을 들여다보면 박 대통령의 향후 국정 운영 기조를 읽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윤호석 정치 컨설턴트는 “문고리 권력을 둘러싼 싸움은 늘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권력자가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다”라면서 “박 대통령이 허 전 실장이 아닌 이 수석에게 왜 힘을 실어줬는지를 살펴보는 게 이번 개편안의 관전 포인트”라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