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불러도 돌아갈 일 없을 것”
최장집 교수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는 민주당이 자극을 받기 위해서라도 안철수 의원의 신당 창당이 잘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일요신문 DB
“처음 연구소를 맡을 때에는 이사장직을 책임지고 할 수 있는 역할로 생각하고 기대했었는데 종국엔 버거웠다. 원래 이 연구소(‘내일’)의 기능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정책개발이나 연구를 통해 이론적으로 정책 대안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역할이 있다. 안 의원의 연구소가 정치권에서 정치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나 역시도 정치적인 역할을 어느 정도는 마다하지 않을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실제로 그 연구소가 해야 할 ‘일’(정치적 역할)의 범위가 상당히 넓었다.”
-어떤 ‘일’을 말하는 건가.
“연구소가 정치인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됐다. 안 의원의 정치세력화를 조직하는 그런 식으로…. 돕는다든지, 지원한다든지, 이런 일을 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이런 역할이 커지면서 내가 정치적 역할을 많이 할 것으로 예상됐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역할과 내가 져야 할 책임 사이에 괴리라고 할까. 앞으로 본격적인 ‘일’이 시작되면 내가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타이틀 없는 자유로운 상태에서 안 의원을 돕는 게 더 나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조직을 운영하면 조직 자체를 운영하고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나 활동 그게 다른 데 많이 소비될 수 있고….”
-이사장이 져야 할 책임이 예상외로 많았나보다.
“그게 부담으로 느껴졌다. 앞으로 ‘조직’이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일단 내가 자유로워지는 게 필요하다고 느꼈다. ‘안 의원이 필요할 때 기꺼이 도울 수 있으려면 이게 더 낫겠다’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안철수 의원이 ‘십고초려’ 끝에 모셔왔지 않은가. 둘의 관계가 꽤 오래 갈 것으로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갈라선 것 같다.
“안 의원의 정책연구소 이사장직을 사임한 건 맞다. 그러나 (안 의원과) 사적인 관계는 유지할 것이다. 안 의원이 필요로 할 때 자문을 해주는 방식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외곽에서 ‘멘토’ 역할을 하겠다는 뜻인가.
“멘토라면 너무 강한 의미다. 이전의 ‘이사장’이라면 멘토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처럼 밖으로 나오면 필요할 때 도움을 주는 사람 정도로 가볍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이제는 다른 야당의원에게도 도움을 줄 의향이 있는가.
“우선 다른 정치인들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잘 모른다. 안 의원이야 어찌됐든 인연이 있는 것이고….”
인터뷰 내내 최 명예교수는 적어도 공식적인 측면에서만큼은 시종일관 안 의원과 선을 긋는 모습이었다. 안 의원과 인간적으로는 친분을 유지하겠으나 다시는 공적으로 얽히고 싶지 않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이에 대해 최 명예교수의 한 지인은 15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최 교수가 처음에 안 의원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주변에서 볼 때 마치 안 의원은 ‘최장집만 데리고 오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조직이 만들어지고 창당이 될 것’이라고 보는 것 같았다. 그러니 최 명예교수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라고 설명했다.
한편 안 의원이 이른바 ‘십고초려’를 하기 전까지는 최 명예교수와 안 의원 사이에 특별한 인연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최 명예교수는 “문재인 의원이나 다른 주요 의원들도 몇몇 있다. 이들이 도움을 요청해오면 거절하겠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내가 안 의원과 인연이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 배타적이란 뜻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재인 의원과도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지난 6월 19일 열린 정책네트워크 내일 창립기념 심포지엄. 박은숙 기자
—‘정치세력을 조직화하는 데 최 명예교수가 나서야 한다’는 기대감들로 인해 굉장히 힘들어했다고 들었다.
“사실에 가까운 얘기다. 그런 건 실제 정치하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안 의원이 (신당 창당에) 적극적으로 나왔다면 사임을 안했을 것인가.
“어찌됐든 정치세력화는 안 의원이 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안 의원이 중간에서 디펜스(방어)를 안 해줘도 내가 (사임이라는 방식을 통해) 할 수 있다. 안 의원이 신당을 만들 필요가 있다면 내가 조언도 하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세력화(를 직접 하라는 것)는…(나에겐) 그 자체로서 또 다른 문제다.”
—안 의원의 신당 창당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인가.
“지금 민주당이 야당을 대표하는 양대 정당인데 국민의 기대수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 스스로 변하는 문제 또한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안 의원의 신당 창당이 잘 되길 바란다. 민주당으로선 자극이 되지 않겠는가. 안 의원 쪽에서도 조만간 정치세력화를 할 것으로 알고 있다.”
—안 의원이 좀 더 적극적으로 신당 창당을 주도했다면 최 명예교수가 덜 힘들었을 것 같다는 얘기도 있다.
“안 의원은 정치를 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다. 갑자기 중요한 정치적 인물이 됐고 본인이 감당하기도 힘든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 건 기대하지 않는다. 내가 할 일은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안 의원이 여론을 너무 의식하는 모습, 이른바 양비론적 태도에 대해 실망했단 말도 들었는데.
“그건 맞다. 나도 평소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그래서 안 의원에게 ‘필요할 때 정치적으로 감수할 줄 아는 게 지도자의 덕목’이라고 조언을 많이 해줬다. 주변의 평가에 대해서 안 의원도 잘 알고 있고 자기 자신의 약점이라면 약점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만날 기회가 있다면 조언을 더 해줄 생각이다.”
실제로 최 명예교수는 최근 사석에서 자신의 측근들에게 “그(안 의원)는 언론을 많이 의식하는 것 같다”며 실망감을 내비친 것으로 전해진다.
—안 의원이 또다시 ‘십고초려’를 해온다면 받아들이겠는가.
“그래도 안할 거다. 사임을 한다는 건 연구소의 공식적인 역할을 사임한다는 뜻이다. 다른 방식으로 관계가 만들어지면 모를까.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최 명예교수는 진보진영의 ‘거두’이자 대표적인 정치 석학이다. 민주당에서 그간 최 명예교수를 영입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을 들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때문에 최 명예교수가 안 의원 진영으로 넘어가자 안 의원도 그 덕에 정치적인 부활을 할 수 있었다. 안 의원은 최 명예교수 영입 전만 해도 노원병 선거에서 기사회생한 뒤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정치적으로 주춤한 모습을 보였다. ‘달았던’ 80여 일은 이제 종지부를 찍었다. 안 의원이 독자적 세력화의 첫 단추로 내놓았던 ‘최장집 카드’가 불발한 상황에서 그가 또 어떤 승부수를 던질지 주목된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