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 바닥까지 경험… 내 간절함 통했다
고교 초특급 투수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던 정영일이 혹독한 인생 공부를 하고 7년 만에 SK 유니폼을 입게 됐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당연히 기억난다. 무려 7년 전이지만, 당시 아버지와 지금 삼성에 있는 동생 형식이랑도 같이 인터뷰하지 않았나. 돌이켜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 것 같다.”
―신인드래프트 현장에는 가지 않고 당시 대구에 있었다고 들었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된 순간,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나.
“동생이랑 함께 중계방송을 보려고 대구를 향하다 차안에서 어머니랑 함께 DMB로 내 이름이 호명되는 장면을 지켜봤다. 조금 기대를 하긴 했지만, 그렇게 빨리 내 이름이 불릴지 몰랐다. SK한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드래프트 발표 전날, 진짜 긴장했었겠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번 드래프트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고, 만약 드래프트에서 떨어지면 야구 포기하고 군에 입대하려 했었다. 그런데 발표 전날보다 더 긴장했던 건 트라이아웃 당시였다. 일본에서 돌아와 급하게 몸을 만들었고, 벼랑 끝에 매달린 심정으로 시험 보는 야구장을 향했는데 조범현 감독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그곳을 찾아오셨더라. 모두가 포수 뒤에 서서 나의 피칭 모습을 지켜보시는데 긴장한 나머지 공이 사람들한테 향할까봐 마음껏 피칭을 하지 못했다. 정말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공을 던져야 하는지 순간 잊어버린 듯했다.”
―그런데도 SK에 지명되지 않았나.
―언론에서는 미국에서 야구했던 시간들을 ‘실패’라고 말한다.
“미국 가기 전까지만 해도 마이너리그만 전전하다가 그냥 돌아오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됐다. 실패가 맞다. 하지만 잃은 것보다 배운 것들이 훨씬 많다. 힘든 시간 동안 인생 공부도 다양하게 했다.”
―미국에서 빅리그 마운드를 밟아보지 못하고 돌아온 데 대해 후회하지는 않나.
“물론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후회는 없다. 그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2006년 에인절스 교육리그부터 참가를 했는데 그때 내 나이가 미국 나이로 열일곱 살이었다. 팀에서도 가장 막내였다. 그런데 교육리그 동안의 경기 성적이 예상 외로 좋게 나왔다. 단번에 유망주 4위에 오를 만큼 팀의 기대가 상승세 일변도였다. 교육리그를 마치고 귀국해서는 운동을 게을리 했다. 왠지 미국 야구가 쉬워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음해 스프링캠프에 들어갔는데 운동을 안했던 티가 팍팍 났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전만큼의 스피드가 안 나오더라. 겨울에 운동을 하지 않고 캠프 때 갑자기 구속을 끌어올리려다보니 팔꿈치에 이상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4개월 정도 재활하고 나서부터 스피드가 나기 시작했고, 더블 A를 거쳐 트리플 A 캠프까지 내달렸다. 캠프 마지막 날, 6이닝에 무실점을 하면서 삼진을 12개나 잡았는데 마운드에 내려오면서 팔꿈치가 끊어진 걸 알게 됐다. 그게 2008년이었고, 그 후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 정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재활에 매달렸고, 1년 6개월 만에 다시 마운드에 올랐지만, 그때는 구단에서 날 기다려주지 않았다. 선발이 아닌 중간계투로 날 쓰려고 하더라. 선발진에는 나보다 더 젊고 실력 있는 유망주들이 차고 넘쳐났던 터라 구단에서는 대놓고 차별을 하기 시작했다. 한때 최고의 유망주로 대접받았던 내가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구단에 정식으로 방출을 시켜달라고 부탁했는데 계약금을 토해 놓고 나가면 몰라도 그냥 내보낼 수는 없다고 하더라. 계속 시간만 보내고 있다가 이번에는 구단에서 조건 없이 날 풀어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혹사 논란이 일었던 것은 알고 있지만, 내가 몸 관리 잘못해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
―한국으로 돌아와도 답답한 상황이 계속됐을 것 같다. KBO의 야구 규약에는 ‘한국 프로구단 소속으로 등록한 사실이 없이 국외 프로야구단에서 활동한 선수는 한국구단에 선수로서 2년간 입단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고 명시돼 있지 않나.
“그래서 고양 원더스로 들어갔다. 내심 그 팀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팀에서 먼저 연락을 해주셨다. 무엇보다 김성근 감독님 밑에서 체계적으로 야구를 다시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훈련 강도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마치 고등학교 1학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래도 야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모든 걸 감수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원더스에서는 더 머무를 수가 없었다. KBO에서 야구 규약을 거론하며 나의 퓨처스리그 출전이 불가하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결국 원더스를 나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에는 이대호 선배의 형님이신 차호 형의 주선으로 일본 독립리그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스에 입단하게 됐다. 거기서 몸을 만들어 갈 수 있었다.”
“나도 정말 아쉽다. 당시 일을 도와줬던 에이전트 형의 말을 믿고 기다렸던 게 결국에는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누구 탓을 하겠나. 내가 잘못 생각한 결과인 것을. 만약 그때 입대했더라면 지난 5월에 제대했을 것이다. 그래도 차호 형이 많은 도움을 주셨다. 마이너리그 시절 에이전트의 무관심에 큰 상처를 받았는데, 차호 형 덕분에 그 상처가 조금씩 치유됐다. 이번에 SK 입단 소식이 알려졌을 때 가장 먼저 연락해주신 분도 차호 형이다. 일본에 있는 대호 형한테서도 축하 문자가 왔다.”
―에인절스 입단 당시 받았던 계약금의 행방이 궁금하다(웃음).
“대부분의 마이너리그 선수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그 계약금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집안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게 부담스럽다. 그냥 그 돈은 내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동생이 삼성 라이온즈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만약 1군 무대에 서게 된다면 동생과의 투타 대결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그런 장면을 상상하면 절로 가슴이 설렌다. 지금 당장은 어렵다고 해도 야구 생활하면서 꼭 만들고 싶은 그림이다. 동생이 야구를 하고 있는 게 큰 힘이 된다. 동생과는 ‘동반자’로 오랫동안 야구판에 머물고 싶다.”
정영일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류제국이 LG 입단 후 재기에 성공한 사실을 주목했다. 더 이상 몸이 아프지 않고, 훈련만 잘 받으면 이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준 고마운 선배이기 때문이다. 미국 생활동안 류제국과도 친분을 맺었던 그로선 류제국의 재기 스토리가 더 가슴에 와 닿았을 것이다.
9월 2일 SK 선수단에 합류하는 정영일은 기자와 인터뷰 당시에도 날짜를 꼽으며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영일이 인터뷰 마지막에 남긴 메시지이다.
“한국 말로 대화하는 동료들과 함께 체계적인 훈련 시스템 속에서 관리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쁘다. 야구를 하지 못하고 지낸 시간 동안 야구에 대한 소중함, 간절함을 느끼고 배웠다. 앞으로 그 마음을 마운드에서 보여주고 싶다.”
광주=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