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맨위부터 끔찍한 조폭사건이 보도된 신문, 영화 <남자이야기>의 한 장면. 오른쪽은 90년 조폭과의 12년 전쟁의 서막을 연 심재륜 당시 서울지검 강력부장. | ||
더구나 피의자가 물고문을 받은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검찰 위상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일선 검사들은 ‘조직폭력배들을 수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면이 있다’고 항변하지만 절대로 고문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피의자를 구타한 검찰의 수사관행을 백번 비판하더라도 이것이 조폭들을 수사하는 검찰 강력부의 손발을 묶는 ‘수갑’으로 작용해선 안된다는 여론도 만만찮다.
법조계 일각에서는 ‘3D’부서로까지 불리는 강력부에서 ‘자기 돈 들여가며’ 수사하는 검사들의 노력도 알려져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금 검찰은 조폭이라는 ‘특수한’ 피의자를 수사하면서 어떻게 인권과 엄정한 법 집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것인가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일요신문>은 검찰 강력부의 발자취를 통해 지금 검찰이 직면한 문제에 대한 해답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근대 조폭의 뿌리는 SBS 드라마 <야인시대>의 종로파 김두한계와 동대문 시장을 주무대로 한 이정재, 임화수계로 이어진다. 이들이 조폭 1세대들인 셈이다. 하지만 5.16 쿠데타 뒤 이정재 등이 사형을 당하면서 그 당시 조폭들은 지리멸렬하게 된다. 그 뒤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까지 그나마 세력을 유지하던 ‘신상사파’가 명동을 기점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이때만 해도 조폭세계는 ‘낭만적’이었다. 계파의 두목 두 명이 담판을 벌여 관할지역을 결정하는 ‘신사협정’이 통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70년대부터 광주를 비롯한 호남 출신 조폭들이 서울 뒷골목을 주름잡게 되면서 오늘날의 ‘3대 패밀리’를 형성하게 되었다.
명동을 중심으로 한 양은파(두목 조양은), 낙원동을 무대로 한 오비파(두목 이동재), 무교동을 주름잡은 서방파(두목 김태촌)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명동 신상사파 등을 패퇴시키고 서울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이때부터 사시미칼이 주요 ‘전쟁 도구’로 등장한다. 3대 패밀리는 그 뒤로 80년대 말까지 급격하게 세력을 키워나가 한국 조폭의 전성기를 이루게 된다. 이들의 겁 없는 질주에 브레이크를 건 사람이 바로 심재륜 초대 서울지검 강력부장(현재 변호사)이었다.
그는 검찰과 조폭 12년 전쟁의 서막을 연 주인공인 동시에 조폭수사의 ‘대부’로 통한다. 심 변호사는 그가 중심이 돼 창설된 서울지검 강력부의 탄생 배경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3대 패밀리는 80년대 후반부터 이미 마피아의 초기 단계 모습을 보여주었다. 예전 조폭들은 정치권력에 빌붙어 각종 선거운동에 동원되거나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해 푼돈이나 만지던 처지였다.
하지만 국가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조폭들이 대형 유흥음식점이나 나이트클럽 등지에서 기생하며 자생적인 경제기반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조폭들의 행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라 당시 언론은 연일 조폭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자연히 검찰에도 비상이 걸렸다. 그래서 89년 들어 민생침해사범수사본부를 설치하다가 그 당시 대검 형사2부를 강력부로 바꾸게 됐다. 그 뒤 또다시 조직개편을 서두르게 되는데 ‘서울지검에도 강력부가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1990년 1월 서울지검에 민생특수부를 설치하게 됐다.
당시는 서울지검 형사3부가 강력사건을 비롯한 형사사건을 맡고 있었는데 형사사건만 처리하다간 깡패들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특수부 식으로 민생특수부를 조직해서 ‘한번 똘똘 뭉쳐서 깡패들을 잡아보자’고 결의했던 것이다.
그해 5월15일쯤에 민생특수부가 다시 강력부로 이름이 바뀌면서 실질적인 강력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90년 당시 심재륜 변호사는 서울지검 특수1부장으로 재직중이었는데 초대 강력부장을 겸직하게 된다. 이때 강력부는 검사 5명, 경찰관 15명, 검찰수사관 24명으로 편성돼 조직폭력 인신매매 등을 집중 단속하게 된다.
또한 서울 부산 수원 인천 대구 광주 등 6대 도시에도 강력부가 신설된다. 서울지검 강력부는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출범한 지 며칠 뒤인 90년 5월19일 서방파 두목 김태촌을 전격 검거하게 된다. 사실 김태촌 검거는 심재륜 당시 특수1부장과 조승식 검사(현 대전지검 천안지청장)가 7개월 동안 공들인 끝에 낚은 ‘특종’이었다.
▲ 90년 1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5월에 검찰 에 다시 구속된 서방파 두목 김태촌. | ||
함승희 검사는 이와 관련해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당시 호청련은 전국 ‘주먹’의 약 80% 가량이 가입했을 정도로 막강한 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LA 도쿄에도 지부를 두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 검찰은 호청련을 마피아 조직의 전 단계로 보고 예의주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심재륜 민생특수부장은 함승희 검사에게 ‘이승완을 검거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함승희 의원은 이씨 검거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때 이씨는 87년 통일민주당 지구당창당 방해사건(일명 용팔이 사건)의 배후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가 자주 드나드는 ‘은신처’를 포착하고 검거작전에 돌입했다. 확실한 증거채집을 위해 사진도 확보한 상태였다. 그리고 검거 당일 경비원이 ‘이씨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말해 검거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허리에 차고 수사관들과 함께 이씨 ‘은신처’를 덮쳤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었다. 사전에 검거정보를 눈치채고 도망갔는지는 알 수 없다. 오랫동안 공들인 작전이 수포로 돌아가 너무 허탈했다. 그리고 죄도 없이 수사관들에게 ‘검거된’ 그 남자에게 너무 미안했다.”
한편 검찰의 검거 의지를 읽은 이승완씨는 함 검사가 덮친 다음날 바로 자수를 해버렸다고 한다. 그 뒤 호청련은 자진해체를 선언해 결국 와해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서울지검 강력부의 활약으로 김태촌은 10년형을 추가로 선고받게 되고 조양은은 15년형을, 이동재는 미국으로 도피함으로써 3대 패밀리도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이때부터 서울지검 강력부의 조폭수사는 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결국 이러한 활동들이 노태우 대통령이 90년 10월17일 자신있게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된 셈이다. 검찰은 전쟁 선포 10일 뒤 전국 10대 폭력조직의 두목 등을 공개수배해 일제검거에 나서게 된다.
심재륜 변호사는 이에 대해 “이때 언론의 협조를 얻어 폭력조직을 잡아들였는데 마피아 초기단계를 분쇄한 셈이다. 이것이 강력부의 혁혁한 공로다. 1년 만에 거의 모든 조직들이 와해됐다”고 자평했다.
실제로 범죄와의 전쟁 선포 1년 뒤인 91년 9월에 발표된 검찰 자료에는 전국에 조폭조직이 2백94개파 6천1백17명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검찰은 이중 3천9백여 명(65%)의 조폭을 구속하는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심재륜 변호사는 “호남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때 와해됐던 호남을 기반으로 한 조폭들이 지금은 거의 되살아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시 거부가 된 조폭도 여럿 있다. 예를 들어 이용호 게이트와 연루된 Y씨, 연예계에서 큰 돈을 번 K씨 등이 대표적인 경우다”라며 조폭의 부활을 우려하고 있다.
심 변호사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의 구속자들이 대거 석방된 것이 주요 원인이다. 검찰은 지난 99년까지 약 1만3천1백87명의 조폭을 구속했으나 그해까지 1만1천3백22명이 출소해 99년에 제2의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90년 범죄와의 전쟁 당시 검거된 행동대장급 이상 조폭은 1천2백여 명에 달한다. 그런데 이들 대부분이 지금은 이미 출감한 상태. 그리고 수괴급 조폭 1백43명 중 1백여 명도 출소해 지금 활동을 하고 있다. 이번 피의자 고문사망사건에 연루된 ‘스포츠파’도 경찰청이 적발한 조폭리스트에 그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구속된 홍경령 전 검사는 스포츠파 일당이 저지른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 2건의 미해결 살인사건을 추적하다가 독직폭행치사혐의로 구속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서 검찰의 조폭에 대한 수사기법이 논란이 된다. 서울지검 강력부는 전국의 조폭수사를 전담해왔기 때문에 조폭들이 상당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지난 90년 범죄와의 전쟁 때 검찰은 서울 부산 등 6개 지검 강력과에 무술 수사요원을 배치하게 된다.
잔인한 조폭들에 맞서기 위해 무술 수사관들을 경찰 등에서 특채를 했던 것이다. 지금 서울지검 강력부 피의자 고문사망사건에 연루된 수사관들 중 2명도 무술 경관 경력이 있는 특채출신이다. 그런데 이들 수사관들은 조폭이 일단 구속되면 기를 꺾어놓기 위해 ‘군기’를 확실하게 잡았다고 한다.
강력부에 오랫동안 근무해온 한 수사관의 얘기. “조폭들이 일단 특조실로 들어오면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넥타이 혁대 등을 모두 벗긴다. 그리고 무술 유단자들인 수사관들이 군기교육을 시작한다. 이들은 수십년간 조폭들만 다뤄온 사람들이라 어떻게 구타를 해야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결재판 슬리퍼 등으로 시작해서 외상이 남지 않게 솜을 두른 각목으로 때리기도 한다. 그리고 피의자들의 하반신을 집중 구타하고 수갑을 채운 채 얼차려를 시키기도 한다. 말로 해서 고분고분 진술할 조폭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적당히 건드려주면 빠른 시간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왜 그렇게 구타관행이 뿌리깊게 검찰에 남아있는 것일까. 이것은 피의자의 자백을 받기 위한 가장 편하고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검찰에서의 자백은 법정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기 때문에 일선 검사들은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드는 직접증거 채집보다 손쉽고 빠른 강압수사 유혹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 살벌한 문신으로 온몸을 도배한 10대 조폭들. 범죄와의 전쟁 이후 와해됐던 호남조폭이 지금은 대부분 살아났다 고 한다. | ||
그런데 심 변호사는 검찰 강압수사의 직접적인 원인이 “YS DJ 정권의 편파적인 인사정책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YS나 DJ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검찰을 이용한 측면이 있다. 당연히 정치적인 연이 있는 검사들을 자신들의 손 아래 둠으로써 권력을 편하게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폐해는 검찰이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왜냐하면 검찰이 정치권력에 휘둘려 올바른 인사를 하지 못하자 결국 강력사건 전문가가 양성되지 못하고, 수사기법 또한 제대로 전수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체계적인 조폭수사가 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결국 의욕만 앞선 몇몇 검사들은 구타로 사건을 해결하려 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노인수 청와대 사정비서관은 조폭수사 기법에 대해 나름대로 노하우를 쌓아온 전직 강력부 검사 출신이다. 노 비서관은 지난 92년부터 3년 동안 광주지검 서울지검 강력부 등에서 조폭수사를 해왔다. ‘영수파’ ‘지존파’ 사건 등 모두 4개의 조폭사건을 범죄단체구성(범단) 혐의로 ‘엮어’ 꽤 높은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발로 뛰는 장기 추적과 직접 증거 수집이야말로 조폭 수사의 관건”이라고 말한다. 이번에 홍경령 전 검사가 3년 넘게 추적한 스포츠파 살인사건도 개인의 집요한 집념 없이는 파헤치기 힘들었던 사건이었다.
90년대 ‘모래시계 검사’로 이름을 떨쳤던 홍준표 의원은 “홍 검사의 경우 내 고교 후배로 잘 아는 사이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사건을 3년 동안이나 추적한다는 것은 강력부 검사의 업무량을 생각하면 큰 희생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국가에서 수사를 전담할 수 있도록 충분한 인력과 예산을 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검사의 집념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라고 하는 것은 무책임한 발상이다.
어떻게 검사의 ‘정신력’에 모든 사건 해결의 열쇠를 부여하려 하는가”라고 반문한다. 홍 의원은 “강력부 검사들도 완력으로 조폭들을 휘어잡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카리스마와 관록으로 그들을 제압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홍 의원은 또 “실적 올리기는 검찰 강력부가 제자리를 찾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실적만을 의식하다 보니 강력부가 조무라기 조폭 수사에나 목을 매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국제조직과 연계된 조직이나 정치권력과 유착된 조폭에 대해 장기적인 수사를 해나가야만 한다”고 말했다.
함승희 의원도 “지금 검찰은 점점 경찰화되어가는 것 같다. 동네 깡패들이나 잡으러 다닌다면 옛날 순사와 다를 게 뭐가 있나. 검찰은 좀더 큰 강력사건에 힘을 쏟아야 한다.
정치권력과 유착된 공생관계에 있는 큰 조직들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폭 뒤를 봐주는 비호세력을 뿌리뽑지 않고서는 조폭수사는 ‘수박 겉핥기’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 많다.
심재륜 변호사는 범죄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정작 인사발령은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는 곳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감방에 간 조폭들의 비호세력들이 역로비를 펼쳐 좌천성 인사를 당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심 변호사는 이에 대해 “조폭 비호세력들의 로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범죄와의 전쟁을 마친 뒤 나는 내심 서울지검 차장이나 지청의 차장으로 발령날 줄 알았는데 정작 간 곳은 대전지검 차장자리였다. 그리고 내 밑에 있던 유능한 강력부 검사들도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고 말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은 조폭들의 ‘명언’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 말이 검찰 강력부의 발목을 잡고 있다. 어떤 이유에라도 고문은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검찰의 손발에 보이지 않는 ‘수갑’이 채워진다면 우리 사회는 법은 멀고 주먹만 가까운 사람들로 넘쳐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