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보증 좀 서주게”…“끄응”
왼쪽부터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
동양은 당장 올해 만기도래하는 기업어음(CP) 7300억 원, 회사채 3150억 원을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 올 들어 수천억 원에 달하는 회사채를 연달아 발행해왔지만 역부족이었다. 설상가상 동양은 지난 11일 신용등급이 기존 ‘BB’에서 ‘B+’로 하향됐다. 그럼에도 또 다시 650억 원어치 회사채 발행을 추진, 오는 9월 30일과 10월 24일 만기도래하는 회사채를 차환하는 데 쓸 예정이다. 돌려막기나 다름없어 곳곳에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동양의 재무구조개선 방안 중 당초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은 계열사·자산 매각이다. 이를 통해 약 2조 원을 마련,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일거에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매각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으면서 큰 차질이 빚어졌다. 가장 인기 있는 매물이었던 동양매직 매각 작업조차 우선협상대상자를 변경하는 등 진통을 겪고 있다.
일각에서는 동양 구조조정의 진정성까지 의심하고 있을 정도다. 재계 관계자는 “훗날 다시 찾을 생각부터 하는 동양매직도 그렇고 아예 매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동양증권도 그렇고, 과연 재무구조개선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현재현 회장은 최후 수단으로 동서인 담철곤 오리온 회장 부부에게 손을 벌렸다. 계열사 자산을 담보로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하는 데 보증을 서달라고 요청했다. ABS 1조 원가량이면 위기를 넘길 수 있지만 현재 동양의 신용으로는 발행이 어려우니 동서에게 도움을 구한 것이다. 쉽게 말해 빚보증을 서달라는 것. 담철곤 회장이 이를 수락하면 좋지만 끝내 거절한다면 현재현 회장은 두 손을 들어야 할 판이다. 동양의 운명이 담철곤 회장 부부에게 달린 셈이다.
동양그룹 위기설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현재현 동양 회장과 담철곤 오리온 회장의 회동 결과에 귀추가 주목된다. 일요신문DB
동양 위기로 발등의 불이 떨어진 금융권 역시 오리온이 ‘백기사’로 나서는 것을 반길 가능성이 크다. 동양이 법정관리로 추락한다면 동양 회사채를 대거 보유하고 있는 농협·수협·신협·새마을금고 등 상호금융조합이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데다 동양이 오리온의 보증을 앞세워 ABS를 발행토록 권유한 쪽이 금융당국이라는 얘기도 있으니만큼 오리온의 백기사 역할을 기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담 회장이 보증을 서줄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무엇보다 오리온 주주들과 투자자들의 거센 반발이 예상된다. 동양의 위기가 오리온으로 전이되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때에 따라서는 담 회장이 법적 책임을 질 수도 있는 사안이다. 만도의 한라건설 지원, 두산중공업의 두산건설 지원 등이 비슷한 경우다.
이제 공은 오리온으로 넘어갔다. 오리온 측은 굉장히 부담스러워하고 있다. 오리온 관계자는 “현재 결정된 것은 하나도 없으며 들은 바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양구 창업주 묘소를 떠나는 담철곤 회장이 ‘도와줄 것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답한 미소의 의미가 어떻게 표출될지 주목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