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 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 65
한옥에서 솟을대문의 지붕은 바로 옆에 붙은 행랑채(문간채) 지붕보다 더 높이 솟아 있다. 또 세 칸으로 만들어진 대문에서 가운데 칸 지붕이 좌우 칸 지붕보다 더 높게 솟은 것도 솟을대문으로 부른다. 기둥의 높이를 행랑채의 높이와 같게 보통 대문이나, 대문간이 따로 없이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워서 문짝을 단 일각대문(一脚大門)에 비해 미적 감각을 지녔다. 처마는 날아갈 듯하고, 지붕선 또한 예사롭지 않다.
솟을대문은 근대화 이전까지만 해도 흔히 볼 수 있었다. 1930년대부터 신문소설을 쫓아가면서 솟을대문이 우리에게 무엇이었는지 접근해보자.
유명한 소설가 심훈(沈熏)이 1935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상록수(常綠樹)>에서 여주인공이자 학교 선생인 채영신이 학교를 세우려고 동네 갑부 한낭청에게 기부금을 걷으러 간다.
그러면서도 (채영신은) 한낭청 집에 소슬대문이 바라보이는 큰 마당 터까지 와서는 (칩칩허게 음식이나 얻어먹으러 애들까지 데리고 오는 줄이나 알지 않을까?)
경주교동최씨고택 제공=경주시
서강 동네를 지나 강가에 나서서 서편을 바라보면 보통 때는 물 한 방울도 없는 개울을 건너 저편 언덕 우에 좌우로 줄행랑이 늘어서고 가운데 소슬대문이 우뚝 솟은 큰 집이 보인다.
역시 솟을대문 집은 으리으리한 규모다. 언덕 위에 좌우로 행랑이 줄지어 있고, 그 가운데 솟을대문이 있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주인공이자 만석꾼의 후예인 최서희의 집에도 솟을대문이 달렸다. 모두 ‘고래 등 같은 기와집’ ‘대갓집’을 연상케 한다. 이유가 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솟을대문은 아무나 짓지 못했다.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벼슬자리를 등급으로 나누었다.
정일품이 제일 높았고, 종구품이 18등급이 가장 낮았다. 이 18품계 중 종이품(從二品) 이상의 대감들은 ‘초헌’이라는 수레를 탔다. 외바퀴와 긴 장대 두 개, 의자로 만든 수레다. 그런데 수레가 아주 높았으므로 문을 드나들기가 아주 불편했다. 대문 윗부분에 닿아 낭패를 봐야 했다. 그렇지 않으려면 대문 앞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했다.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행랑채를 비롯해 집 전체를 높이 짓는 방법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8척~9척 높이의 건물을 짓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두 번째 해법을 생각해냈다. 문을 높게 짓는 방식이다. 솟을대문을 세우면 대감은 수레를 탄 채로 마당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문지방에 반드시 바퀴가 지나갈 홈을 파야 했다.
중원윤민걸가옥. 제공=문화재청
솟을대문은 궁궐 후원의 사랑채와 안채, 서원, 향교에서도 볼 수 있다. 요즘에 와서 아파트를 지으면서 공원에 솟을대문 형태의 정자를 함께 짓는 것은 이런 부와 권력의 상징을 활용한 측면이 있다.
솟을대문에는 더 관찰할 미적 요소들이 있다. 대들보에는 언제 건축되었는지 기록이 남겨져 있다. 기단과 기둥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도 관심사다. 문짝에는 꽤 큰 문고리가 달렸다. 또 꽃무늬를 새겨 만든 장식 철판인 국화쇠를 붙였다. 문짝 위에는 오리목(가늘고 길게 켠 목재)이나 쇠오리(쇠로 만든 가늘고 긴 조각)로 만든 살창을 설치했다. 부정과 잡귀가 감히 범접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근대화 이후의 우리가 지은 주택을 버릴 수 없다. 우리 사회가 서구화를 발전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서양식 주택은 이미 우리 생활 속에 들어와서 나름대로 삶과 문화를 이루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본래 주택은 평지의 넒은 대지에 높지 않고 넓게 지어야 한다는 우리의 전통의 주택 관념은 아예 사라지고 말았다. 양반의 주택이었지만 여전히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하고, 장식적 기교를 멀리하고, 구불구불한 소나무를 그대로 활용하는 한옥과 솟을대문의 아름다움은 영영 사라지는 것 아니냐는 아쉬움이 든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 ‘한국의 문과 창호’ (대원사, 주남철, 2011) / ‘한국 미의 재발견-용어 모음’ (솔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