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 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 66
소주나 맥주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겠지만 소맥 폭탄주다. 지난해 한 시장조사 업체가 조사를 했더니 전체 응답자의 85%가 가장 즐겨 마시는 술로 소맥 폭탄주를 꼽았다. 제조하기 나름이지만 이 술의 도수는 보통 10도 안팎이다.
다시 문제다. 1920년대 우리 조상이 마신 술 가운데 소맥 폭탄주와 가장 비슷한 술은?
<동아일보> 1924년 2월 5일자를 보자. 1면에 약주(藥酒), 탁주(濁酒), 백주소주(白酒燒酒), 과하주(過夏酒), 이강주(梨薑酒, 배와 생강즙을 섞어 빚은 소주), 감홍로(甘紅露, 소주에 붉은 곡식을 넣어 발그레한 빚을 낸 것), 송순주(松荀酒) 가운데 즐겨 마시는 술은 약주, 백주, 탁주, 소수, 과하주라고 소개했다. 알코올 도수에 대한 설명도 나오는데 약주는 10~20도다. 소주는 보통 30도 내외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높아져 50도에 이르는 것도 있다고 적었다. 과하주는 10~18도다. 과하주가 알코올 도수라는 측면에서 ‘소맥’에 가장 가깝다.
과하주가 소주와 약주를 섞어 만든 술이라는 점에서도 ‘소맥’을 닮았다. 증류주인 소주와 발효주인 약주를 혼합했다.
물론 ‘소맥’은 완성품인 소주와 맥주를 섞는다는 점에서 과하주와 다르다. 술을 섞는 이유도 다르다. 과하주는 여름에 오래 두고 먹으려고 곡주에 소주를 섞었다. 알코올 농도가 높으면 한여름에도 술맛이 변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냉장고가 없었던 시절에 저장성을 높이려고 만든 술이다.
제공=한국전통음식연구소
조선 초기부터 서울을 중심으로 여러 지방에서 빚었는데, 일제강점기부터 경북 김천 과하주가 명성을 떨쳤다. 김천 과하주는 ‘한 번 마시면 석 달 열흘 취한다’는 전설이 있는 술이다. 민가에서 조금씩 만들다가 1928년에 김천주조주식회사가 설립되어 대량으로 생산됐다. 김천에 가면 누구나 과하주를 한 잔 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고급술이어서 값이 비쌌다. 또 절기에 맞춰 제조했으므로 늦은 봄이나 이른 여름이 아니면 마실 수가 없었다.
김천에서 처음 과하주를 만들게 된 연유가 있다. 경북 김천 남산공원 뒤에는 과하천(過夏泉)이라는 샘이 있는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김천을 통과하다가 내성산 산록(山麓)에서 솟아나오는 청수(淸水)를 맛보고 명나라의 과하주를 양조하는 중원(中原) 과하천의 물맛과 같다고 했다. 이 말을 좇아서 그 천수(泉水)로 과하주를 제조하게 되었다. 김천이라는 이름도 거기서 유래한다고 한다.
<동아일보> 1929년 5월 29일자 5면에 김천주조주식회사가 낸 광고를 보자.
<동아일보> 1929년 5월 29일자 과하주 광고.
가격도 나와 있다. 과하주는 4홉에 1원, 김천주는 4홉에 35전, 감로주(甘露酒)는 4홉에 30전이었다. 여기서 ‘한 홉’은 한 되의 10분의 1로 약 180㎖에 해당하므로 4홉은 720㎖다. 과하주가 다른 술보다 2~3배 비싸다. 같은 광고가 5월 8일, 5월 22일 계속 되고 있어 과하주가 잘 팔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1934년 5월 24일자 3면에는 전국 각지에서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는 기사도 있다.
과하주는 김천 외에 황해도 풍천의 과하주가 명성을 떨쳤다. <동아일보> 1935년 5월 19일자 4면에는 황해도(黃海道) 풍천(豊川) 과하주(過夏酒)라면 해평지방(海平地方)에서 유일한 명산물로 그 이름이 자못 높다는 기록이 나온다. 1950년대 서울에서도 과하주를 생산했다는 기록이 있다.
과하주는 1970년대에 들어서 위기를 맞았던 것 같다. <경향신문> 1973년 1월 17일자 1면 ‘여적’에는 과하주 같은 전통술들이 사라지고 막걸리와 소주만 남았다는 한탄이 나온다. 필자는 우리의 정서와 세태가 넘쳐흐르는 농주가 새로 나타나기를 바란다고 썼다.
이제 과하주는 김천뿐만 아니라 전라도 등지에서도 만들고 있다. 전주에서는 장군주, 전남에서는 아랑주, 영광토종주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전통술에 대한 국민의 이해와 사랑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참고문헌
네이버 지식백과 /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세시풍속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