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금고 못연다”…비밀서류 보일러 속으로
모두 믿기지 않는 현실 앞에 망연자실할 뿐 말문을 열지 못했다. 김종필은 관 뚜껑을 열고 고인의 존안을 한참 들여다 본 뒤 “표정이 편안하시다. 그렇게도 크신 분이었는데…”라고 할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김종필은 이어 비서실장실에서 김계원 비서실장과 30분쯤 요담했다. 사건의 진상을 추궁하면서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잘못된 보좌를 준열히 질타했다.
고 박정희 대통령 유해가 청와대를 출발, 영결식장인 중앙청 광장으로 운구되고 있다. 연합뉴스
‘역사의 기록이냐, 아니면 믿었던 심복의 반역으로 가신 불행한 모습을 남기도록 해야 하는 것인가. 과연 바람직한 역사의 기록이 될 것인가. 시대 변화에 따라 악용될 소지는 없을 것인가….’
끝내 사진 촬영은 이뤄지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 주검의 모습이 한 장면도 남아있지 않음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10월 27일 오전 6시 30분경, 이른 아침 식사로 해장국이 나왔다. 식사 중 친척 누군가가 “우리는 곡(哭)하는 부대냐. 평소에는 얼씬도 못하게 하더니…. 육 여사 때도 그랬고 이럴 때만 불러들이고…”라며 서운한 속내를 터트리기도 했다. 박 대통령의 철저한 친인척 관리 때문에 불편을 겪었던 불만이리라. 김종필은 해장국밥을 먹으면서 착잡한 심정과 독백을 이렇게 토로했다.
“영웅답게 돌아가셨다. 혁명가답게 가셨다. 내 손발이 다 잘리고 무장해제 된 상태에서 이렇게 돌아가시면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인가….”
육군참모총장 출신인 서종철 안보 특별보좌관은 “김재규가 차지철만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 꿇어앉아 잘못을 빌 일이지 어떻게 형님 같은 대통령께 총구를 겨눌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개탄했다.
앞으로의 정국 혼란과 안보 문제에 대한 걱정들이 많았다. 정국 추이를 주시하면서 박 대통령의 민족중흥과 근대화의 이념을 계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성급한 애기도 나왔다. 이에 대해 “흘러간 물은 다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는 법”이라고 한 대목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신직수 전 정보부장의 말이었다.
불안 초조 비통 허망의 시간이 지나고 27일 아침이 되었다. 오전 9시경 구자춘 내무부 장관이 다른 장관과 수석비서관 몇몇이 모여 있는 비서실장실에 들렸다. 구 장관은 간밤에 김재규를 취조 수사한 상황을 긴급뉴스로 전했다. 얼음 욕조 목욕을 시켰다느니, “8군 쪽에서 무슨 연락이 없었느냐”는 김재규의 반문이 있었다느니, 등의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27일 오전 11시경 나는 김계원 비서실장과 단독 면담했다. 국가 안보와 향후 정국 대책, 차기 정권 문제 등에 대해 국무총리, 안보관계 장관, 공화당 수뇌(김종필 등)들과 협의하라고 건의했다. 이에 대해 김 실장은 “내가 뭐 지금 그런 거 할 수 있나…”며 맥 빠진 중얼거림이었다.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누구와도 대화를 않은 채 사무실만 지키고 있었다.
낮 12시 30분경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짧은 통화를 끝낸 김 비서실장은 집에 가 있겠다면서 논현동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경호실 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비서실장이 귀가 했는데 그의 신변보호를 위해 경호 요원을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20분쯤 지나서 전화가 왔다. 보안사에서 경비하고 있으니 경호실 요원이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가택연금이 된 것이다. 외부 인사의 출입금지는 물론 부인과 가족들의 출입도 엄격히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김 비서실장이 대통령 시해 사건에 연루되어 유죄 판결을 받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실 김 비서실장은 대통령 시해 사건에 연루, 가담할 만큼 대담하거나 모험적이지 못했다. 그렇게 무모하고 저돌적인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다. 모태신앙의 기독교인으로 천성이 온화하고 음악과 영화를 좋아하는 가정적이고 낭만적인 사람이었다. 대인 관계가 모나지 않으며 친화력이 뛰어났다. 군인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여러 요소를 간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야전군 사령관, 참모총장을 거쳐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했다. 중앙정보부장 단명 퇴임 후 주 대만대사 9년 만에 김재규의 주선으로 귀국, 비서실장에 임명됐던 것이다.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로 미루어 보아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서로 상의하고 위로와 협조를 나누는 우호적인 사이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차지철 경호실장의 정보부장에 대한 월권, 대통령의 차 실장 편애 등으로 인한 갈등과 긴장, 김재규의 내면에서 끓어오르고 있는 분노의 강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김 비서실장이리라. 그리고 그 분노의 폭발 가능성과 폭발의 강도에 대해서도 김 비서실장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간과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고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지만과 근혜·근영 삼남매가 슬픔에 잠겨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있다. 연합뉴스
예방됐어야 했다. 역사에 대한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너무나 아쉽기 때문이다.
김계원 비서실장이 가택 연금된 27일 오후 1시 30분경 보안사 합동수사본부에서 비서실장실을 조사하겠다고 우 아무개 대령 등 수사관 3명이 나왔다. 비서실장실과 보좌관 방, 부속실 등을 조사했다. 그러나 별로 조사할 것이 없었다.
원래 비서실장실에는 서류 같은 조사 대상물이 없다. 대통령의 재가 또는 보고 서류는 모두 수석비서관실에서 작성, 보관 관리하기 때문이다. 모든 지시는 전화로 처리했다. 수사관들은 전화통화 기록부를 요구했다. 그러나 비서실장실에서는 하루 수십 통 내지 백여 통의 전화를 하기 때문에 통화기록부를 만들 수 없었다. 나는 이러한 사정을 설명하고 굳이 필요하다면 청와대 전화교환실에 연락하면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서실장실과 붙어있는 내 방도 조사했다. 내 책상 옆에 있는 대형 금고를 조사하겠다며 금고를 열 것을 요구했다. 금고 안에는 대통령의 통치와 관련된 기밀문건, 자료, 군사외교에 관한 비밀문건, 대미 의회비밀 로비와 관련된 문건, 대통령의 비자금 등 최고 기밀사항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수사관들이 이것을 조사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대통령의 통치기밀임을 들어 단호히 거절했다. 합수부에서 끝내 조사하겠다면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합수본부장에게 내가 직접 설명하겠다고 버텼다. 그들은 금고에 봉합 딱지를 붙이고 돌아갔다. 금고 조사는 이후에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날 오후 5시경 나는 참고인 진술 차 삼각지 국방부 옆에 있는 합동수사본부로 연행, 구금되었다. 경호실장과 정보부장의 갈등관계, 10·26 당일의 시간대별 상황 등을 진술조서로 작성해 달라고 해서 그 작업을 몇 번씩 되풀이 했다. 이틀 밤을 묵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죄를 짓고 이렇게 들어와 있으면 얼마나 불안할 것인가.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굳게굳게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나를 담당했던 수사관, 소령이 김 비서실장 가택 수색을 나가야 한다면서 논현동 자택 약도를 그려 달라고 하여 그려 주었다.
다음날 참고인 조서를 다시 쓰라고 해서 같은 내용을 옮겨 쓰고 있는데 그 수사관이 지금 곧 보안사령관실로 가야 한다고 재촉했다. 모든 것을 중지하고 그와 함께 청와대 옆 보안사령부로 갔다. 전두환 사령관과는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있을 때 안면이 있었던 터라 수인사를 나누고 위로의 말과 차 대접을 받고 청와대로 돌아왔다. 다음날 금고 안에 보관 중이던 9억 5000만 원을 박근혜 큰 영애에게 전달하였다.
남은 문제는 금고 안에 있는 기밀서류의 처리였다. 비서실장이 연금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를 누구와도 상의하지 못한 채 내 책임 아래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내용물 중 관계기관에 이관할 것은 이관하고 영원히 비밀로 해야 할 것들만 따로 골라 보자기에 쌌다. 그리고 유족 대표 자격으로 대통령 장조카 박재홍과 합수부 서 아무개 중령이 입회한 가운데 보자기를 내 손으로 청와대 보일러실에 던져 모두 불태우고 말았다. 이로써 정치적으로 민감한 대통령의 통치기밀 자료는 영원한 비밀에 묻힌 것이다. 10월 29일 오후 6시경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연재를 시작하며
역사의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필자 권숙정은?
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렴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
역사의 이삭을 줍는 마음으로
권숙정 씨
1972년 3월부터 1979년 10월까지 대통령공보비서관(연설문담당) 2년, 김정렴 비서실장 보좌관 6년, 김계원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10개월 재직하면서 유신과 육영수 여사 서거를 겪었고, 특히 박정희 대통령 서거와 관련해서는 중심부에서 그 뒤처리를 했다.
1979년 12월부터 1980년 3월까지 최규하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봉직하면서 전두환 신군부 등장, 최 대통령 취임과 조기퇴임, 전두환 대통령 취임 등 격변의 순간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