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타자’ 또 있나? 빚더미 기업에 눈총
동양채권자 비상대책위원회가 9일 동양증권 피해자들과 함께 금융감독원 앞에서 정부와 금융당국을 상대로 피해보상 대책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개인투자자는 물론 기관도 난색을 표하는 실정이다. 자금을 조달하려는 기업들도 계획이 틀어져 힘들겠지만 회사채 발행 주관이 큰 수익원 중 하나인 우리 입장에서도 미칠 노릇이다. 기관을 끌어들이려면 그들을 왕처럼 떠받들고 우리가 하인처럼 굴어야 할 정도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동양 사태 이후 냉각된 시장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CP·회사채를 무더기 발행했던 동양그룹 계열사들이 잇달아 법정관리를 신청해 투자자들의 분노를 자아내더니 이번에는 회사채 발행으로 신규 자금을 모집하려던 기업들에 애를 먹이고 있는 것이다.
한 대기업 임원은 “지난해 웅진 사태 직후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채 풀리기도 전에 동양 사태가 터져 손해를 보고 있다”며 “일부 계열사들이 회사채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할 계획인데 예전보다 힘겨워졌다”고 한숨을 쉬었다. 이 대기업 계열사들의 신용등급은 대부분 ‘트리플비(BBB)’로 투자등급에 해당한다. 이 임원은 “우리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투기등급인 ‘더블비(BB)’인 동양이 수천억 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그렇게 쉽게 해왔다는 것이 진작부터 의문스러운 부분이었다”고 덧붙였다.
‘동양그룹 관련 금융상품(회사채, CP 등) 불완전판매 신고센터’에서 투자자들이 신청서를 작성하는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재계와 금융권의 시선은 부채비율이 높고 유동성에 문제가 있는 대기업들로 향하고 있다. 업황이 좋지 않은 데다 부채비율이 높은 동부, 두산, 현대, 한진그룹 등도 금융권과 시장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들 기업은 나름대로 선제적 대응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 동부그룹의 경우 동부익스프레스 지분 매각에 이어, 당진화력 지분 매각을 검토하는 등 시장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동부그룹 관계자는 “동양, STX 등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면서 선을 그었다.
건설부문의 어려움과 수많은 인수·합병(M&A)으로 재무부담이 가중된 것으로 알려진 두산그룹 역시 유동성 위기를 점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두산그룹 관계자는 “두산 유동성 위기설은 완전히 잘못된 얘기”라며 “밥캣과 두산건설에서 비롯된 위기는 해결된 지 오래인 데다 두산건설의 부채비율 역시 200%대로 낮아졌고 계열사들의 회사채 발행도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반박했다. “회사가 어려우면 금융권에서 가만히 있겠느냐”는 것이 이 관계자의 말이다.
두산인프라코어는 당장 2500억 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계획하고 있다. 올 들어서 세 번째로, 지난 1월에는 2000억 원, 4월에는 1500억 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한 바 있다. 두산인프라코어 관계자는 “아직 정확하게 마무리된 것은 아니지만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동부그룹은 동양·STX 등과 한데 묶이는 것에 대해 억울해한다. 수천억 원 규모 회사채의 만기도래가 올해와 내년 첩첩산중임에도 전혀 걱정할 것 없다는 반응이다. 그러나 신용등급 ‘BBB’인 동부제철은 최근 400억 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추진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나마 정책금융공사가 절반가량인 199억 원어치를 인수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금리 7%로 예상했던 것이 9.5%로 껑충 뛰었다.
뒤늦게 관리·감독 강화에 나선 금융당국은 차입금이 많은 기업들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금융당국이 주시하고 있는 여러 기업 중 한 기업 임원은 “회사채 문제는 전혀 없으며 유상증자 역시 최종 발행가액만 결정되면 순조롭게 끝날 것”이라며 “조금 남아 있는 CP와 영구채 발행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잘 마무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양 사태 후폭풍에 시달리는 기업들은 자금 사정과 조달에 대해 하나같이 “전혀 문제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법정관리 신청으로 하루아침에 쓰러진 동양그룹은 법정관리 신청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만한 대비 없이 (회사채를) 계속 발행하겠느냐”고 반박했다. 그러나 동양이 말한 대비는 바로 ‘법정관리’였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