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따로 있다” 주장 끝나지 않은 미스터리
지난 2009년 자살한 장자연이 남긴 자필 문서의 일부를 입수해 단독 보도한 KBS 뉴스 화면 캡처.
2009년 3월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자연 문건 파동. 수사가 진행되는 몇 개월 동안 각 매체의 연예부 기자는 물론이고 사회부 기자까지 관련 취재에 매달려 매일 오전 분당경찰서에서 열리는 수사 브리핑에 100명 가까운 취재진이 몰려들었을 정도였다. 별다른 실체를 밝혀내지 못한 경찰 수사가 마무리된 뒤에는 문건에 어떤 내용이 있으며 누구누구의 이름이 거론돼 있다는 각종 루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심지어 한 수감자가 주장한 장자연의 ‘친필편지’가 자작극으로 드러나 세간이 떠들썩해진 사건도 있었으며,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노리개>가 개봉되기도 했다.
이런 터라 많은 이들이 ‘장자연 문건’ 하면 여전히 그 내용과 거기 이름이 거론된 유력인사가 누군지에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요즘 법정에서 한참 다뤄지고 있는 부분은 ‘장자연 문건’의 내용이 아닌 실제 작성자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장자연 문건’이 고 장자연이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면, 내지는 누군가 이를 위조한 것이라면 그동안의 모든 논란은 모두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주장을 펼치고 있는 이는 고 장자연이 사망했을 당시 소속사 대표인 김 아무개 씨다. 김 씨 측은 ‘장자연 문건’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유 아무개 씨가 자신을 인신공격했으며 ‘장자연 문건’까지 직접 작성, 내지는 위조했다며 5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게다가 이미숙과 송선미 등의 배우도 연루돼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모두 과거 김 씨가 대표로 있는 연예기획사에서 함께 일했다. 그러다 매니저로 일하던 유 씨가 독립해 새로운 연예기획사를 만들었으며 이미숙과 송선미 등도 유 씨가 새로 만든 회사로 소속사를 옮겼다. 고 장자연 역시 김 씨의 회사에서 유 씨의 회사로 소속사를 옮기려 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과정에서 ‘장자연 문건’이 유 씨의 손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장자연 문건’ 파문 이후 이들 사이에선 법정 분쟁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회사를 옮기는 과정에 대한 전속계약 분쟁은 물론이고 이번 명예훼손 관련 소송, 그리고 이번엔 ‘장자연 문건’을 고 장자연이 아닌 유 씨가 작성했다는 의혹에 관한 소송이었다.
이를 위해 김 씨 측에선 ‘장자연 문건’에 등장하는 필체가 고인의 것이 아니라는 유족의 주장, 그리고 문건의 필체가 유 씨의 필적 일부와 유사하다는 감정 내용 등을 증거로 법원에 제출했다.
지난 20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5부(장준현 부장)는 김 씨가 유 씨와 배우 이미숙 송선미 등을 상대로 낸 이번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실질적으론 김 씨의 패소나 다름없다.
우선 재판부는 “문건이 장 씨의 글씨가 아니라고 유족이 주장한 바는 있지만 그런 사정만으로 유 씨가 문건을 작성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장자연 문건’을 고인이 아닌 유 씨가 작성했다는 김 씨 측의 주장에 대해선 증거 부족이라고 판단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감정 결과가 ‘장자연 문건’의 필체가 고 장자연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나오기도 했다. 또한 김 씨와 전속계약 분쟁을 겪고 있던 이미숙과 송선미가 ‘장자연 문건’ 작성 과정에 개입했다는 김 씨 측의 주장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욕 혐의에 대해서만 원고 김 씨 측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피고 유 씨가 원고 김 씨에게 7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애초 소송액이 5억 원이었음을 감안하면 700만 원 지급 판결은 사실상 원고 김 씨의 패소다.
판결에 즈음해 장자연 문건 원본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과거 유 씨와 함께 일했던 탤런트 M이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2010년 초 장자연 문건 원본을 직접 봤다고 주장한 것. ‘장자연 문건’은 2009년 3월 유족의 결정에 따라 서울 봉은사에서 불태웠다고 알려져 있으며 불타고 남은 일부가 언론을 통해 공개됐지만 중요한 내용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M은 “유 씨가 당시 불태운 건 가짜이고 원본은 최후의 보루라며 내게 보여줬다”고 밝혔다.
이미 법원에선 ‘장자연 문건’을 고인이 아닌 유 씨가 작성했다는 김 씨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원본이 나타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지금은 불타고 남은 문건의 사본과 일부를 가지고 유 씨와의 필적을 대조해야 하는 상황이라 필적 감정에 한계가 분명하지만 원본이 등장하면 제대로 된 필적 대조가 가능해진다.
이런 까닭에 현재 김 씨 측은 유 씨가 여전히 보관하고 있는 ‘장자연 문건’을 공개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만약 ‘장자연 문건’이 존재해 그 안에 신인 여배우가 성상납과 술자리 접대를 강요당한 내용이 모두 들어있다면 김 씨는 매우 곤란해질 수 있다. 고 장자연에게 이를 강요한 당사자가 바로 김 씨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문제의 문건이 김 씨의 주장처럼 김 씨와의 분쟁에서 활용하려고 고 장자연이 아닌 유 씨가 직접 작성했거나 위조한 것이라면 거기에 쓰여 있는 내용도 의미를 잃게 된다.
김 씨 측은 이번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할 계획이다. 항소 과정에서 거듭 김 씨 측은 유 씨에게 ‘장자연 문건’의 법원 제출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아직 원본이 있다고 주장한 탤런트 M 역시 법원에 출두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또한 김 씨가 배우 이미숙을 상대로 공갈미수, 출판물 등에 의한 명예훼손, 무고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제기한 형사고소 사건도 있어 관련 재판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관련자들을 둘러싼 법정 다툼에서 ‘장자연 문건’ 논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