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판대장’ 오승환은 9년 동안 277세이브란 기록을 선물로 남기고 이제 일본의 최고 마무리에 도전한다. 우승에 목마른 한신 타이거즈에 ‘우승 유전자’를 품고 새로운 무대에 오르는 오승환은 일본 야구에 대해 기분 좋은 기대감을 전하며 인터뷰에 응했다.
마운드에서 벗어난 ‘자연인’ 오승환은 어떤 모습일까. ‘돌부처’의 이미지로 각인된 그이지만, 오승환도 즐겁고 재미난 일이 벌어질 때는 폭소도 터트리고 썰렁한 농담도 즐기는 평범한 남자였다. 오히려 그는 언론에서 자신의 무표정한 이미지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표정이 없는 사진만 올리는 것 같다며 조심스레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지난 3일,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만난 오승환은 입단식(4일)을 앞둔 설렘과 일본 생활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전하며 조금씩 ‘한신맨’ 오승환으로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오승환은 일본 무대로 향하며 걱정과 두려움보다는 설렘과 기대가 더 크다고 말했다. 최준필 기자 choijp@ilyo.co.kr
# 등번호 21번에서 22번
2005년 삼성 입단 후 9년 동안 오승환의 등을 지킨 번호는 21번이었다. 신인 선수가 21번의 등번호를 달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오승환이 입단할 즈음에 21번을 달고 있던 고참 선수가 팀을 떠나면서 자연스레 그 번호가 오승환에게 주어졌다. 21번은 오승환의 승승장구와 함께 날개를 달았다. 그런데 한신에서의 오승환은 22번을 달게 된다.
“삼성에서 달았던 21번은 처음부터 의미있는 번호가 아니었다. 9년간 동고동락하면서 내가 의미를 만들어가는 번호로 변화시켰다. 반면에 한신에서 달게 되는 22번은 삼성에서 처음 만났던 21번의 상황과 환경이 하늘과 땅 차이다. 일본에서는 22번이란 번호가 최고의 마무리 투수한테 부여하는 번호라고 하더라. 원래는 21번을 주겠다고 했지만 지금 한신에서 21번을 달고 있는 이와타 미노루 선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정중히 거절했다. 그랬더니 22번이 주어진 것이다. 22번은 지난해까지 한신에서 뛰었던 후지카와 규지(통산 220세이브)가 달았던 번호라고 들었다. 부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번호는 등에 달린 것이지, 내 앞에 보이는 게 아니다. 22번이란 등번호 자체를 잊고 마운드에 오를 것이다.”
# 후지카와 규지와 다르빗슈
오승환은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중인 다르빗슈 유와 후지카와 규지에 대한 생각을 솔직히 밝혔다. 대표팀과 오키나와 전지훈련 중에 두 선수와 직접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는 오승환은 다르빗슈 유의 피칭을 직접 보고선 자신이 중학생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2011년 오키나와 스프링캠프 때 당시 니혼햄 에이스였던 다르빗슈 유가 삼성과의 연습경기에 선발 등판했다. 그날 다르빗슈 유는 3이닝을 던졌는데 결과는 무안타 무실점에다 탈삼진 3개를 기록했다. 3이닝 동안 노히트노런으로 우리 선수들의 혼을 쏙 빼놓고 내려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캠프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수는 최고 155㎞짜리 직구를 선보였다고 하더라. 세상에 그런 투수는 없었다. 그렇게 완벽한 피칭을 하는 선수를 처음 봤다. 다르빗슈 유 앞에서의 난 중학생 같았다. 내가 그렇게 작아 보일 수가 없었다. 경기 후 복도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와! 키가 정말 크더라. 나하고도 체격 차이가 엄청났다(다르빗슈 유 196cm, 102kg, 오승환 178cm, 91kg). 투구 내용뿐만 아니라 체격면에서도 다르빗슈 유가 한수 위였다.”
올시즌 시카고 컵스로 진출한 후지카와 규지는 2007년 46세이브를 기록하며 2006년 이와세 히토키(주니치)가 갖고 있던 일본 프로야구 최다 세이브 기록과 타이를 이뤘다. 오승환은 2006년과 2011년 두 차례나 47세이브를 기록, 이 부문 아시아 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오승환이 후지카와의 등번호를 달고 한신에서 생활하게 된 것이 사뭇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후지카와 선수는 대표팀 때 직접 더그아웃까지 찾아가서 악수를 나눴을 정도로 오랫동안 관심있게 지켜본 선수였다. 일부러 그 선수의 경기를 챙겨 보기도 했었다. 다른 이유는 없다. 일본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흥미를 가졌을 뿐이다. 그랬던 선수의 등번호를 이어 받게 돼, ‘그때 악수를 나눴던 게 인연이었나?’ 싶었다. 아무래도 22번을 달고 뛰면 일본 내에선 후지카와와 비교를 즐겨할 것이다. 그러나 내 성격상 그런 데 신경 쓰거나 휘둘릴 타입이 아니다. 한국에서처럼 일본에서도 내 길만 걸어가겠다.”
#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배, 임창용
오승환이 가장 좋아하는 선배를 꼽는다면 임창용이 넘버원이 될 것이다. 오승환은 임창용 얘기만 나오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선배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삼성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이어진 인연은 오승환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일본 생활을 경험한 임창용과 또다른 인연의 색깔을 더해간다.
“창용이 형은 투수로서, 인간적인 면으로서, 배울 게 많은 선배이다. 나한테는 창용이 형이 최고의 투수이고, 최고의 선수이다. 그 형이 언론친화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대중적으로 노출되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실제 그 형의 진면목을 알게 되면 늪처럼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선수 입장에서 창용이 형을 능가할 만한 소방수는 없다고 본다. 창용이 형이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처음 오른 모습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었는데, 올해보다는 내년에 더 보여줄 게 많은 형이라고 생각한다. 시카고 컵스에서 논텐더로 FA 공시가 됐다고 하지만 솔직히 걱정이 되지 않는다. 늘 힘든 길을 선택했고, 도전했고, 의미를 부여해 나간 형이기 때문이다.”
임창용과 오승환은 둘 다 말수가 적은 선수들이다. 둘이서 식사를 하게 되면 “형, 밥 먹어요” “그래 먹자” “승환아, 다 먹었니? 그럼 나가자”가 전부라고. 그러나 그 사이에 윤성환과 안지만이 합류하면 분위기가 ‘개그콘서트’로 변질된단다. 한때 대구에서 윤성환, 안지만과 2년 동안 동거를 했었던 오승환은 임창용을 중심으로 재미있게 뭉쳤던 ‘대구의 4인방’을 잊지 못할 것이다.
오승환과 진갑용은 9년간 배터리를 이루며 호흡을 맞춰왔다. 독특한 세리머니는 진갑용의 제안으로 시작됐다고.
# 세리머니의 ‘신’ 진갑용
2005년부터 배터리를 이루며 호흡을 맞춘 오승환과 진갑용. 둘은 어느 순간부터 오승환이 세이브를 올리고 삼성이 승리를 하게 되면 손가락으로 하늘을 찌르는 세리머니를 즐겨 했다. 한국시리즈에서 극적인 승부를 펼친 뒤 승리를 거머쥔 오승환이 진갑용의 품으로 달려가 안긴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오승환은 진갑용 외엔 다른 포수와 세리머니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미소를 띠며) 갑용이 형과의 세리머니는 내가 먼저 착안해 낸 것이 아니다. 갑용이 형이 먼저 하자고 해서 시작한 것이다. 다른 포수들과 안한 이유는 안한 게 아니라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먼저 하자는 제안도 없었고, 그렇다고 내가 먼저 하자고 말하기도 그렇고. 갑용이 형이 한신과 계약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후 연락이 없다(웃음). 일본 가기 전에 식사라도 함께 하려면 내가 먼저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다. 삼성에서의 9년은 갑용이 형과 함께 한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훌륭한 포수를 만난 덕분에 나한테 좋은 일들이 생긴 거라고 믿는다. 영원히 잊지 못할 형이다.”
# 한국시리즈의 ‘악몽’ 홈런 두 방!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이 많은 오승환이지만, 가슴 아픈 순간도 있었다. 홈런을 잘 맞지 않는 그가 한국시리즈에서 결정적인 홈런 두 방으로 무너진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승환은 2006년 한국시리즈 3차전과 2013년 한국시리즈 2차전을 끄집어냈다.
“2006년 한국시리즈 3차전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삼성이 3-1로 앞서던 8회말 2사 1루 상황이었다. 당시 한화 심광호 선수가 타석에 들어선 후 나한테 동점 투런 홈런을 뽑아내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려놓고 말았다. 그 선수가 그라운드를 도는 모습을 보면서 어찌나 화가 나고 어이가 없던지…. 그 악몽이 올해에도 비슷하게 재연됐다. 두산에 충격의 첫 패배를 당한 후라 2차전의 승리가 절실했었다. 그런데 4이닝 53개의 투구수를 올려놓고선 오재일 선수한테 솔로 홈런을 얻어맞았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나. 순간 확 짜증이 났다. 내 자신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욕은 다했던 것 같다. 2차전 패배가 3차전까지 이어지면서 우리 팀 더그아웃은 거의 초상집 분위기였다. 대구에서 2패를 하고 잠실로 넘어가 3패까지 당하자, 한국시리즈 우승은 물 건너간 듯 했다. 3연패 후 우승을 했다는 건 거의 기적이나 마찬가지의 일이다.”
오승환은 우승 직후 선수들이 단체로 행한 세리머니에 대한 뒷얘기도 털어 놓았다.
“경기 전에 나랑 갑용이 형이 주도해서 단체 세리머니를 만들었다. 그러나 몇몇 선수들 사이에선 ‘설레발’ 쳤다가 우승을 놓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걱정을 내비치기도 했었다. 다수의 의견이 세리머니를 만들자는 데 동의했고, 만약 우승이 확정되면 내가 먼저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키면 모든 선수가 따라하자고 약속을 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작 우승을 하니까 내가 할 새도 없이 모든 선수들이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다. 정말 재미있고, 멋진 장면이었다.”
# 국보급 투수와 스승과 제자로 만나다
2005년 삼성에 입단했던 오승환은 그 해, 수석 코치에서 삼성 감독에 오른 선동열 감독과 만나게 된다. 어린시절 오승환의 영웅이나 마찬가지였던 국보급 투수 밑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하는 소감이 어떠했을까.
“어휴, 감독님의 그 아우라와 카리스마는 정말 대단하셨다. 감독님이 아무 말씀 안하시고 뒤에서 피칭 동작을 지켜보시는 것만으로도 신경이 쓰일 정도였다. 워낙 유명한 분이고, 투수 부문에선 그 분을 능가할 만한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선동열 감독 밑에서 프로의 세계를 접한 점은 나한테 큰 도움이 됐다. 지금은 다른 팀 감독님이시지만, 시상식장에서 만나 뵐 때마다 조언도 많이 해주신다. 감독님에게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 ‘싱글남’ 오승환한테 결혼이란?
선동열 감독은 오승환의 일본 생활에 대해 결혼을 하고 갔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오승환도 이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결혼은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정작 부모님은 결혼에 대해 덤덤한 편이신데, 주위에서 더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다. 그러나 대구에서 9년을 혼자 지냈다. 2년간 (윤)성환이 형, (안)지만이랑 함께 지냈던 걸 제외하면 7년을 혼자 생활한 셈이다. 혼자 지내는 데는 익숙한 편이고, 평소 내가 잘 돌아다니지 않는 성격이라 일본이라고 해서 특별히 더 낯설고 외롭고 힘들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결혼은 언젠가 하게 되겠지만, 지금 당장은 결혼보다 일본 야구에 빨리 적응하는 게 우선이다. 일본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 ‘돌부처’ 오승환, 일본에서도?
무표정, 포커페이스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오승환은 자신이 마운드에서 웃지 않게 된 일화를 들려준다.
“중학교 때 야구 경기가 끝난 뒤였다. 아버지가 내가 야구하는 모습을 보신 후 이렇게 야단을 치셨다. ‘왜 야구장에서 실실거리며 웃느냐’고.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장난치며 웃음을 터트린 내 모습이 못마땅하셨던 것이다. 그때부터 잘 웃지 않았던 것 같다. 마운드에서는 웃을 일도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훈련 중이나 더그아웃에 있을 때는 선수들과 얘기도 하면서 잘 웃는 편인데, 방송이나 신문에서는 주로 웃지 않는 표정만 노출시키는 터라 ‘돌부처’ 이미지가 굳어진 것 같다. 이 이미지 때문에 내가 웃음을 터트리거나 미소를 짓고 있으면, ‘오승환 선수도 웃을 줄 아세요?’라며 묻는 분도 있더라. 나도 알고 보면 따뜻한 남자이다(웃음).”
# 한국 프로야구, 에이전트 제도 필요하다!
FA를 경험한 오승환은 올해 FA를 치른 다른 선수들을 떠올리며 한국에도 하루 빨리 에이전트 제도가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5년 전에 에이전트 제도가 도입됐더라면 한국 야구가 지금보다 내적 성장을 더 많이 이뤄냈을 것이다. 구단 관계자들은 에이전트 제도에 불편한 시각을 갖고 있던데, 내가 보기엔 구단도, 선수도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제도라고 생각한다. 9년간 한솥밥을 먹던 구단 고위관계자와 선수가 돈 문제로 언성을 높이거나 감정이 상하는 일들이 벌어진다면 그 선수가 그 팀에 남아도, 또는 떠나도 기분이 찝찝할 수밖에 없다. 더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는 선수들이 구단과의 돈 문제로 아름답지 못하게 이별하는 경우를 봐왔다. 최고의 인기 스포츠인 프로야구에 에이전트 제도가 도입되지 못하고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수정 보완해서 프로야구의 에이전트 제도가 하루 빨리 시행될 수 있기를 바란다.”
오승환은 한신 타이거즈와의 입단 과정에서 자신이 직접 협상 테이블에 앉은 적이 없었다. 사인 직전에 구단 관계자와 식사를 했던 게 전부이다. 협상은 모두 김동욱 에이전트(스포츠인텔리전스 대표)가 담당했고, 계약 과정 내용은 에이전트로부터 자세히 전해 들었다. 생애 처음으로 에이전트 제도를 접한 오승환으로선 에이전트 제도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일본 다음은 메이저리그?
오승환은 한신 타이거즈와 계약을 맺기 전, 미국 메이저리그 팀들로부터 여러 차례 러브콜을 받기도 했다. 한때는 메이저리그행을 놓고 진지하게 고민을 한 적이 있다고도 밝혔다. 그런데 왜 고민만 하고 메이저리그를 접게 됐을까?
“팀을 선택하는데 세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그 팀이 나를 정말 필요로 하는가, 두 번째는 그 팀이 그 리그에서 인기있는 팀인가, 또 하나는 우승할 수 있는가 였다. 그 조건에 모두 부합한 팀이 한신이었다. 잠시 메이저리그 진출에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일단 일본에서 내 실력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만약 2년 후 나한테 다시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메이저리그 진출에 욕심을 내볼 수도 있다.”
오승환은 자신의 친정팀인 삼성 라이온즈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삼성맨’으로 살아간 데 대한 자부심은 곧 승리와 직결됐다고 설명한다.
“이번에 한신과 계약을 맺으면서 삼성이 보여준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다. 5000만 엔의 이적료 외엔 조건 없이, 쿨 하게 날 보내줬다. ‘역시 삼성’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까 생각나는 분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잘할 때나 못할 때나 응원과 지지를 보여줬던 라이온즈 팬들, 그리고 정들었던 선수들, 감독님, 코칭스태프, 또 구단관계자 분들, 홍보팀 형들과의 이별을 감당하는 건 생각 외로 힘겹기만 하다. 그러나 언젠가 돌고 돌아서 다시 만날 분들이기에 더 이상 아파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라이온즈에서 타이거즈로 유니폼을 바꿔 입었지만, 삼성은 나의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으로 남을 것이다. 내 심장에는 라이온즈의 뜨거운 피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