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회에서 원칙으로 정한 법이 능멸당하는 모습을 법의 밥을 먹으면서 수없이 목격했다. 노조로 분장한 파괴주의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 했었다. 중앙에서 파견되는 직업적 행패꾼들이었다. 그들의 폭력은 이미 노동운동의 한계를 넘고 있었다. 그들의 범죄를 고소해도 경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법정에 몰려와 파란 불꽃을 뿜으면서 적의를 드러냈다. 판사들조차 원칙을 선언하기보다 외면하는 것 같았다.
증오와 질투가 전염병이 되어 사회에 번진 걸 봤다. 남의 땅을 수십 년 공짜로 살면서 감사하기는커녕 돈을 주고 나가라고 해도 버틴다. 법정에서도 그들은 우린 자본주의 법을 따르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외쳤다.
원칙으로 세운 법이 실종된 이유가 뭘까. 얄팍한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비겁한 태도가 그 뒤에 도사리고 있었다. 광우병 사태의 원인도 정치였다. 값싼 쇠고기를 수입해 서민들도 저녁이면 소주 한 병에 불판에서 익는 고기를 먹는 행복이 더 컸다. 그러나 정치권에서는 소수의 축산업자들과 국내에서만 통하는 허울 좋은 애국 명분 때문에 앞뒤가 다른 비겁한 태도를 취했다.
모두 잘 될 수 없다. 최선을 위해 차선을 양보하는 게 선택이고 정치다.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고 이번에는 철도노조와 공권력의 힘겨루기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그 말 자체가 모순이다. 기득권을 가진 일부의 나태와 부정이 발견됐다면 공권력은 그걸 파헤쳐 바로잡아야 한다. 관료적이고 방만한 경영이 확인되면 민영화해야 하는 게 맞다.
철도가 민영화되면 차비가 수십만 원씩 된다는 말도 있다. 정부는 왜 철도개혁을 해야 하는지, 국민에게 실질적으로 어떤 이익이 돌아가는지 정직하게 설명해야 한다. 정치적 계산으로 민영화는 안하겠다고 상대방에게 명분을 주는 건 비겁하다. 기세에 눌리거나 감당하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원칙이 유린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를 더 이상 기약할 수 없다.
유대인들의 율법 속에는 심지어 똥을 누는 법도 들어있다. 조항은 간단하다. 호미를 가지고 텐트 밖으로 나간다. 땅을 판다. 일을 마치고 그걸 흙으로 묻는다가 전부다. 율법을 위반할 경우 돌로 쳐 죽이라는 규정도 많다. 그들은 지금도 안식일이면 미련할 정도로 원칙을 지킨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는 율법의 의미가 무얼까 생각해 봤다. 깊은 의미는 결국 함께 잘 살자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공의로운 공권력에는 복종하라고 했다. 공권력을 집행하는 사람들의 정치권 눈치 보기와 보신, 그리고 정치인들의 계산적인 교활함이 바로 원칙이 실종된 사회를 만드는 주범이다.
변호사 엄상익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