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드컵 휘장사업은 대회 엠블럼, 마스코트 등의 상업적 이용 전반을 아우르는 대규모 사업.지난 2001년 11월 부산 벡스코 월드컵홍보관 개관식 테이프커팅에 참석한 국제 축구계 인사들의 머리 위로 대회 공식 엠블럼이 보인다. | ||
코끼리 몸통은 코오롱TNS월드를, 다리는 CPP코리아와 G사를 빗댄 표현이다. 당시 이 사업을 위해 급조된 코오롱TNS월드의 위세는 대단했다.
신설된 지 한달도 채 안된 신생 법인체인 이 회사는 2002년 상반기 당시 청와대에 직접 매주 주간 보고를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의혹으로만 떠돌던 청와대의 깊숙한 개입 정황은 점차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CPP코리아는 결과적으로 월드컵 휘장사업권을 코오롱TNS월드에게 넘겨야 했다. 여기엔 서울 총판업체인 G사도 거들었다. 부실기업인 코오롱TNS가 최종 승자가 된 셈이다. 그런데 지금 검찰 수사는 CPP코리아와 G사의 초기 로비 행태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진짜 비리의 몸통은 코오롱TNS와 그 자회사인 코오롱TNS월드이다. 당시 정부, (월드컵)조직위가 하나같이 코오롱TNS만 싸고 돌았다.”
‘2002월드컵상품중소기업인피해대책협의회’의 김순환 실장은 최근 이 사건의 본질이 자꾸 몇몇 정치인들이 개입된 로비에만 치우치는 것에 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사건에 대한 용어 자체도 ‘월드컵 휘장사업 관련 총체적 비리’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한주 월드컵 휘장사업 관련 로비의혹은 점입가경이었다. 이인제 자민련 의원의 특보가 CPP코리아측의 로비를 받았고, G사의 S대표의 ‘로비리스트’가 발견되었다는 검찰 수사결과가 잇따라 나왔다. 사업권자였던 코오롱TNS월드에 대해서는 아직 구체적 내용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의혹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코오롱TNS월드는 모회사인 코오롱TNS가 월드컵 휘장사업권을 확보한 뒤 이 사업을 위해 2002년 1월 신설한 회사. 업계 주변 얘기에 따르면 단 일주일만에 급조된 회사라고 한다. 당시 코오롱TNS월드의 심완보 사장은 코오롱TNS 대표이사였다. 이 회사의 회장은 이동보씨였다.
심 사장은 월드컵을 앞두고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국내 중소기업 1백20개 업체와 사용권 계약을 맺었고, 자체 생산제품에 대한 하도급업체 80여곳 등 모두 2백여 중소기업이 참여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심 사장의 말처럼 코오롱TNS월드의 초기 사업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그러면 일주일만에 급조된 회사가 이처럼 각광받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배후엔 코오롱 그룹과 월드컵조직위, 그리고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다.(<일요신문> 지난호 ‘월드컵 휘장사업자 변경로비 의혹’ 기사 참조)
▲ 정몽준 전 조직위원장(왼쪽), 박지원 전 청와대특보 | ||
코오롱 본사측은 “이웅렬 회장이 외유중이니 2~3일만 기다려달라”고 통보했다. 그리고 며칠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물론 이 회장의 재가가 있지 않았겠느냐”고 당시 코오롱TNS의 한 관계자는 밝혔다. 알려진대로 이웅렬 회장은 이동보 회장의 조카이다.
월드컵조직위측은 한술 더 떠 FIFA에 보내는 공문에 아예 ‘코오롱TNS는 코오롱 그룹의 자회사’라고 명기하기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정몽준 조직위원장과 김용집 사무국장이 코오롱TNS를 강력히 추천한 흔적도 포착되었다.
여기에 당시 청와대의 K수석과 C비서관의 등장은 ‘휘장사업에 청와대도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기자는 또다른 관계자로부터 청와대의 개입이 더욱 뚜렷한 증언을 들었다.
전 코오롱TNS월드 방효수 사업단장은 기자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매주 코오롱TNS월드의 업무에 관한 보고 사항을 청와대 국정상황실에 문건으로 보고했다”고 처음으로 언론에 폭로했다.
당시 보고 문건의 작성을 직접 담당했다고 밝힌 방씨는 “보고서는 심완보 사장이 보내는 형식으로 본인이 작성했으며, 국정상황실의 권 아무개 국장에게 전달되었다. 이 보고서는 권 국장을 통해 박지원씨에게 바로 보고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박씨를 통해 대통령에게도 보고된다고 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당시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었던 전병헌씨는 “그런 보고서를 전혀 보지 못했으며, 그런 것이 보고된다는 얘기도 금시초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정상적으로 국정상황실의 담당자를 통해 비서실장에게 올라가는 보고서라면, 중간에 위치한 내가 몰랐을 리가 없다”며 정상적 절차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밝혔다.
그는 또 “당시 국정상황실에서 월드컵과 관련된 일개 개인 사업자의 보고를 매주 받을 이유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방씨가 청와대에 주간 보고서를 올리기 시작한 것은 2002년 2월초였으며, 3월20일 회사측으로부터 해임을 통보받을 때까지 계속했다고 한다. 방씨가 보고를 올린 당시 박지원씨는 청와대 정책특보였다.
방씨가 퇴임한 후에는 임원이던 서 아무개씨가 보고서 작성 업무를 담당했다고 전했다. 이 보고서는 당시 청와대측의 요청으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매주 토요일에 작성되어 월요일에 문건 형식으로 직접 청와대에 보내졌으며, 청와대측은 이 보고서를 검토한 뒤 심 사장에게 전화로 답변 내지는 다른 지시사항을 전달했다는 것.
보고 내용은 주로 코오롱TNS월드측이 정부에 자금 지원 등을 요청하는 내용이 주였다고 한다. 방씨의 증언 내용이 사실이라면 많은 의문점이 뒤따른다. 비록 범국가적 사업인 월드컵 성공의 일환이라 하더라도 청와대가 일개 회사에게 직접 보고서를 받았다는 점도 극히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관련 당사자인 박 전 특보와 권 전 국장의 확인 인터뷰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심 전 사장 역시 “월드컵 휘장사업과 관련해선 더이상 얘기하고 싶지 않다”며 확인을 거부했다.
한편 월드컵을 앞둔 당시 휘장사업 관련 독려를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휘장상품 제조업체를 방문하려 했다는 증언도 나와 주목된다. 관련업체의 한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생산 현지를 방문할 계획이라며 엘리베이터 설치가 되어 있는 회사들을 수배한 바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대통령의 직접 방문은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제조업체 가운데 하나인 (주)일흥어패럴에 청와대 모 비서관이 방문해 “월드컵은 국가의 국책사업이며, 16강 진출보다 월드컵을 계기로 중소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더 우선이다”라는 말로 격려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일흥어패럴의 한 관계자는 “당시 대통령이 직접 방문한다는 얘기는 없었지만 청와대 고위급 인사가 방문한다는 얘기를 듣고 준비했으나, 막상 비서관이 방문해 좀 실망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