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 앞둔 학생처럼 ‘밀린 숙제’ 몰아치기
지난해 발표된 3년차 공약이행도 중간평가에서 최상 등급 SA를 받은 안희정 충남지사, 김관용 경북지사, 강운태 광주시장(왼쪽부터). 일요신문 DB
물론 이전에도 선거에 나서는 후보자들이나 당선자들에겐 공약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은 제대로 된 이행 모니터링과 후속 평가 절차가 거의 없었다. 지키지도 못하는 선심성 공약들이 남발된 이유다. 그런데 이번 민선 5기부터 현직들이 많이 바빠졌다. 현재 16개 광역시도와 227개 기초단체 모두는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실천본부)가 주관하는 매니페스토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매니페스토운동이란 선거와 관련한 공약 및 목표와 이행 가능성, 예산 확보의 근거 등을 후보자 스스로 공개하는 운동을 말한다. 이렇게 공개된 자료는 응당 임기 말 평가의 기준이 되는 셈이다.
광역자치단체를 비롯해 일선 기초단체까지 이러한 매니페스토운동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개정 선거법에 있다. 지난 2008년 선거법 개정(공직선거법 60조 4항 의거)에 따라 각 후보자들은 선거 공약 및 추진 계획을 공보 할 수 있게 됐다. 의무조항은 아니지만, 선거법에 권유사항으로 규정된 만큼 지난 5기 후보자들부터 공약 자료 제작 및 공포를 대부분 이행하게 됐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가 행정개혁 사안으로 내세우고 있는 ‘정부 3.0’사업이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부 3.0’이란 정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가 보유한 공공정보를 누구나 손쉽게 활용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자는 공공정보 개방운동이다. 이러한 ‘정부 3.0’의 정보 공개 여파 탓에 현직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자신의 공약 이행도를 공개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 선관위와 지방자치단체 홈페이지에는 4년 전 당선자들의 공약집이 공개돼 있다. 실천본부가 들어선 것은 2006년이고, 선거법이 개정된 것은 2008년, 정부3.0을 지향하는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에 들어섰다. 민선 4기부터 공약 평가가 이뤄져 왔지만, 사실상 본격적으로 제대로 된 평가서가 나오는 것은 이번 민선 5기가 처음인 셈이다. 재선을 노리는 현직 입장에선 여러모로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실천본부에선 16개 광역시도와 227개 기초단체가 공개하는 공약계획서와 공약이행현황을 토대로 매년 중간평가를 진행한다. 평가과정은 각 지역의 학계와 시민사회계 인사 40~70명이 참여하고 객관적 평가기준과 방법으로 진행된다. 평가등급은 최상 ‘SA’부터 최하 ‘D’등급으로 나뉜다.
일단 지난해 발표된 3년차 중간평가에선 재선 도전자 중 안희정 충남지사와 김관용 경북지사, 강운태 광주시장이 최상위 등급인 ‘SA’를 받았다. 박원순 서울시장, 이시종 충북지사, 우근민 제주지사가 ‘A’로 뒤를 이었으며, 부채 문제 해결에 난항을 겪고 있는 송영길 인천시장, 최문순 강원지사가 평가 대상자 중 가장 낮은 ‘B’를 받았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가 중간평가다. 실천본부는 오는 3월 사실상의 최종평가서라 할 수 있는 4년차 평가서를 공개할 예정이다. 이에 재선에 도전하는 광역단체장들은 그동안 부족했던 주요 공약 이행도를 만회하고 폐기 공약 점검에 여념이 없다는 후문. 개학을 앞두고 숙제가 밀린 학생들과 비슷한 처지다.
재선에 도전하는 한 광역단체장 측근은 “각 부서마다 공약 이행 사업을 점검중이다. 그동안 좋은 평가를 받아왔지만, 선거를 앞둔 최종 평가인 탓에 부담되는 것이 사실”이라며 “솔직히 예산 문제 탓에 폐기된 몇몇 공약이 존재하는데, 주민과의 소통을 거쳐 합의됐다는 점을 알아줬으면 할 뿐이다. 공약이라고 다 이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선거를 앞두고 여러 여론조사자료가 나온다. 이는 선거 판세의 흐름을 파악하는 참고자료일 뿐이다. 그 자료 역시 정확치 않다”라며 “만약 현직이 나오는 지역이라면 지금까지 약속한 공약들을 잘 집행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특히 정부3.0시대를 맞아 이제 현직 후보자들은 도망갈 곳이 없게 됐다”고 밝혔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