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와 권력 사이’ 어디로…
대상자라고 해서 보유 주식을 반드시 신탁하거나 팔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안전행정부 주식백지신탁심사위원회에 보유 주식의 직무 관련성을 심사청구해 위원회에서 직무 관련성이 없다는 결정이 나오면 주식을 계속 보유할 수 있다. 그러나 황 사장은 심사청구도 하지 않고 자진 사퇴했다. 중견기업인 주성엔지니어링이 중소기업청과 관련이 없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 듯하다.
황 사장의 경우는 백지신탁제도가 마련된 이후 내정자가 자진 사퇴한 첫 사례로 꼽힌다. 주식백지신탁제도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안전행정부 관계자는 “당시 황 사장은 중소기업청장에 내정된 후 주식백지신탁제도의 절차를 알게 됐고 스스로 어렵다고 판단해 사퇴한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
이 제도는 최근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의 서울시장 출마가 유력시되면서 다시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만약 정 의원이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하고 당선된다면 보유 주식 처리에 대한 논란이 불을 보듯 빤하기 때문이다.
정 의원은 현재 현대중공업 지분 10.15%를 보유해 현대중공업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다. 재계에서는 정 의원이 여전히 현대중공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정 의원이 서울시장에 당선된다면 현대중공업 주식을 모두 처분해야 할 수도 있다. 이는 곧 아버지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 때부터 이어온 현대중공업 오너 자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정몽준 의원과 현대중공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비록 정 의원이 “현대중공업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돼) 어떤 변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회사는 계속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아버지 때부터 이어온 기업인 데다 지금의 정 의원이 있기까지 현대중공업이 큰 힘이 됐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만 31세인 지난 1982년 현대중공업 사장에 오른 정 의원은 5년 후인 1987년 현대중공업 회장 자리에 올랐다. 이듬해인 1988년 울산 동구에 무소속으로 출마,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지금까지 7선 의원으로 대통령 후보로 오르내리고 있기도 하다. 정 의원이 처음 울산 동구를 시작으로 정치에 입문할 수 있었던 데는 현대중공업 회장이라는 ‘명함’과 재력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정 의원이 현대중공업을 포기할 것이라고 보는 재계 인사들은 거의 없다. 재계 고위 인사는 “그동안 정몽준 의원의 행보에 비추어 현대중공업을 포기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정 의원 쪽에서 여러 가지 검토하고 있겠지만 만일 백지신탁을 할 수밖에 없다면 서울시장 출마를 다시 생각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에 정몽준 의원 측은 “서울시장에 출마하면 백지신탁 문제는 법과 원칙에 따르겠다는 것이 정 의원의 뜻”이라며 “출마 관련 여부는 너무 늦지 않게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 의원은 차기 서울시장과 현대중공업 대주주 유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까. 지난 1월 23일부터 열흘간의 방미 일정을 마치고 3일 귀국한 정 의원은 블룸버그 전 뉴욕시장을 만난 일을 소개하며 “그의 재산은 수십조 원에 달하지만 당선 후 관련 위원회에서 심사를 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결했다”고 밝혔다. 본인의 현대중공업 주식도 문제가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는 뉘앙스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 ‘주식백지신탁과 관련해 약속받은 게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오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직무 관련성’이다. 과연 서울시장 업무와 현대중공업이 관련 있느냐는 것. 실제로 정 의원은 국회의원 당선 후 보건복지위원회나 외교통일위원회 등 기업과 관련 없는 위원회를 돌면서 ‘직무 관련성이 없다’는 이유로 현대중공업 주식을 계속 보유하고 있다. 이 같은 사례로 정 의원이 보유 주식의 직무 관련성이 없다는 판결을 노릴 수 있다. 정 의원 측은 “직무 관련성에 관해 공식적으로 검토한 바는 없지만 울산의 배 만드는 회사와 서울시장이 무슨 연관이 있느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우리는 단순히 배 만드는 기업이 아니다”고 누누이 강조해온 현대중공업의 기존 입장에 배치된다. 실제 현대중공업은 조선·해양·플랜트뿐만 아니라 정유와 증권사까지 거느린 거대 기업집단이다. 최근 조선의 매출 비중도 30%에 못 미친다. 현대오일뱅크 주유소 등 서울에도 관련 사업장이 적지 않다. 게다가 서울시장은 국가 최고정책심의기관인 국무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유일한 지자체장이라 어떤 판결이 나올지 알 수 없을뿐더러 직무관련성이 없다는 판결이 나온다 하더라도 특혜 논란을 피할 수 없다.
가능성은 또 있다. 정 의원이 보유 주식을 아들인 정기선 현대중공업 수석부장에게 넘긴다는 것. 현행 제도에 따르면 배우자 및 직계존비속의 보유 주식도 모두 매각하거나 백지신탁하도록 돼 있지만 독립생계가 인정될 경우, 고지거부자로서 주식 보유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김장호 안전행정부 복무담당관실 과장은 “직계존비속이어도 독립생계를 하고 있고 그것이 증명되면 고지거부자로 인정, 백지신탁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정 의원이 보유 주식을 독립생계·고지거부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아들 정기선 부장에게 넘기면 ‘정씨 일가’가 여전히 현대중공업 오너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양도세·증여세만 해결하면 된다.
만약 이렇게 되면 현대중공업은 본격적으로 3세 경영 체제에 돌입한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정 의원이 조기에 후계구도를 마무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 의원이 수천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양도·증여세를 감수하고 이 방법을 택할지는 의문이다. 현대중공업 측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 대해 뭐라 말할 단계가 아니다”라며 말을 아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