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5월18일 광주 전남대학교에서 강연회를 마치고 나오던 노무현 대통령이 노사모 회원들에게 손으로 하트모양을 만들어 보이고 있다. | ||
노 대통령은 지난 연말 여권 인사들과의 연쇄 오·만찬, 이른바 ‘식탁정치’를 통해 다가오는 총선에선 반드시 거야소여(巨野小與)의 구조를 깨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이를 위해 재신임을 총선에 연계할 수도 있다는 뜻을 밝혔는가 하면, 영남권에서 ‘의미있는’ 의석을 얻기 위해 동원 가능한 모든 인사들을 선거에 내세우는 이른바 ‘올인’전략도 구사할 것임을 내비쳤다.
그러나 여권 핵심인사들은 “노 대통령이 생각하는 목표의석 1백석에서 1백20석 정도”(이강철 열린우리당 중앙위원)를 달성하기 위한 관건은 호남 민심의 향배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영남권의 스코어는 전국정당화를 위한 상징적 의미에서 중요한 것일 뿐, 실제 의석 수 면에서는 호남권을 석권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는 것이다. 특히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양상에서 호남의 중요성은 더욱 더 배가된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에 대한 호남 민심은 싸늘하기만 상황. 연초 발표된 각 언론매체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정당 지지도는 대부분 민주당의 절반에도 못미쳤다. <동아일보>·코리아 리서치 조사에선 전남에서 민주당 50.4%-열린우리당 12.7%, 광주에선 민주당 41.3%-열린우리당 20.7%였다. 민주당보다 지역 의원 수가 더 많은 전북에서도 열린우리당은 21.1%에 그쳐 민주당(30.1%)에 뒤진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당으로 치우친 호남 민심을 되돌리기 위한 여권의 공세가 그만큼 고강도·전방위일 수밖에 없는 이유라 하겠다.
▲ 염동연 전 특보 | ||
노 대통령은 이어 “광주에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며 “내가 일련의 오해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줬으면 한다”고 염 전 특보에게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염 전 특보는 이강철 열린우리당 중앙위원과 함께 노 대통령의 시니어급 최측근 인사. 대선 승리의 일등공신이었지만 나라종금 사건에 연루돼 지난해 5월 노무현 정권 출범 후 ‘구속 측근 1호’를 기록하는 불행을 겪었다.
염 전 특보는 그러나 지난해 10월26일 보석으로 풀려난 후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특히 최근 여권 내에서 호남권 대책 문제가 본격화되면서 행동반경이 확대되고 있다.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과 잦은 회동을 갖고 열린우리당 중진들과 만나는 광경도 자주 목격되고 있는 것.
얼마 전 염 전 특보와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는 열린우리당 한 인사는 “이제까지 영남권에서 이강철 중앙위원의 활동에 주목했다면, 앞으로는 호남에서 염 전 특보의 역할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특히 노 대통령이 4월 총선에서 광주 출마 뜻을 굳힌 염 전 특보에게 호남 대책의 상당부분을 맡긴 만큼, 쓸 만한 ‘작품’들이 연이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호남 생각’은 11일 전북 출신의 정동영 의원이 열린우리당 대표(당 의장)로 선출되는 과정에도 개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소식통들은 우선 김근태 원내대표가 김원기 전 공동의장 등 당내 중진들의 집요한 출마 권유에도 불출마를 결정한 이유를 ‘노심’(盧心)을 읽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 우리당 당대표로 선출된 정동영 의원. 노심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는 후문이 다. 이종현 기자 | ||
여권 한 핵심인사는 “노 대통령은 일찌감치 열린우리당 총선 사령탑은 세대교체론과 호남 선거를 감안할 때 정 의원이 적임이란 생각이었다. 일부에서 PK(부산·경남) 출신에 영남권 단일후보인 김정길 전 행자부 장관을 당 의장으로 밀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PK 대통령-PK 여당 대표’는 애시당초 수용하기 어려운 구도였다. 대중적 파괴력도 파괴력이지만, 특히 민주당 분당사태 이후 여권에 등을 돌린 호남권 민심을 되돌리기 위해 ‘정동영 카드’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의중은 이강철 조성래 정윤재 최인호 송인배씨 등 영남권 측근들에 전달됐고, 실제 이들은 경선에서 김 전 장관 대신 정 의원을 적극 지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이 지난 연말을 전후해 민주당 한화갑 전 대표에게 관계개선을 희망한다는 뜻을 열린우리당 중진 K의원을 통해 전달한 것도 예사롭지 않은 대목. 민주당 분당 이전 한 전 대표가 직·간접적으로 수차례 면담을 요청했을 때 이를 외면했던 노 대통령이다.
그런 노 대통령이 이번엔 한 전 대표에게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민 만큼 배경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권 내에선 설훈 조성준 전갑길 조한천 의원 등 민주당 내 재통합론자들이 한 전 대표 계보란 점과 노 대통령의 메시지를 연결짓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청와대 문희상 비서실장, 정찬용 인사수석의 최근 행보도 눈여겨볼 대목. 먼저 문 실장은 올 들어 노 대통령과 DJ 간 관계개선의 첨병으로 나선 듯한 인상. 문 실장은 1월1일 동교동 DJ 자택으로 세배를 간 데 이어, 6일 프라자호텔에서 열린 팔순 잔치에선 건배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평생 두 번 시집갔는데 한 번은 (DJ가 92년 대선에서 떨어진 뒤) 이기택 총재에게, 지금은 노 대통령에게 가 있다. 친정(DJ)이 욕을 먹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저를 낳아주신 것은 부모지만, 안아주시고 세상에 나오게 해주신 분은 DJ이며 지난 70년대 사부로 모신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문 실장의 이날 발언에 정치권이 주목하는 것은 그가 ‘DJ맨’에 한때 ‘한화갑 캠프’의 참모장이었던 데다 스스로 ‘운명적인 통합론자’임을 공언하고 있다는 점. 게다가 최근 DJ를 대북 특사로 ‘모셔’ 여권과의 끈을 확실히 만들자는 주장이 핵심부에서 거론되고 있는 만큼 문 실장의 향후 행보는 이래 저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정찬용 수석도 호남소외론 불식을 위해 행동반경을 서서히 넓혀가고 있다. 청와대에서 호남문제를 책임지고 있는 정 수석은 7일 한 경제부처 초청 특강을 통해 “호남소외론이 생긴 것은 균형보다 자율성을 너무 강조했기 때문”이라며 “앞으로 자율성에 제동을 걸어서라도 균형을 도모하겠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향후 노무현 정부 인사정책에서 호남 배려가 두드러질 것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며 정치권에서는 정 수석의 이 같은 발언이 2월로 예정된 대폭 개각과 공기업 경영진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에서 구체화될 것이란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