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재 때도 버텼는데 부실 복원으로 ‘흔들’
숭례문의 국보 1호 해제론이 불거지면서 여론은 찬반 양론을 띠고 있다. 이와 더불어 ‘국보 1호 교체론’과 ‘관리번호 폐지론’까지 동시에 일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숭례문에 대한 ‘국보 1호 해제론’이 최근 이슈로 떠오르게 된 배경은 지난 5일 나선화 문화재청장의 발언이 시초가 됐다. 나선화 문화재청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숭례문이 ‘1호’의 지위를 계속 유지해야 할지에 대한 국민적 공론화 작업이 필요하다”며 “숭례문 복원과 관련한 감사원 감사와 경찰 조사 등이 마무리된 후 연말쯤 이 문제를 끄집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부실 복원 논란으로 몸살을 앓은 숭례문의 국보 1호 지위는 이미 물 밑에서 조금씩 균열이 일어난 바 있다. 여기에 문화재청의 수장까지 나서 숭례문의 국보 1호 해제론을 공개적으로 꺼내들자 문화재계 내부에서는 “이제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다. 문화재위원회에 소속됐던 한 관계자는 “숭례문의 국보 1호 해제 얘기는 이미 몇 차례 나오지 않았느냐. 매번 논의만 하다 무산됐는데 이제는 제대로 논의를 해야할 것 같다”라고 전망했다.
숭례문의 국보 1호 해제를 둘러싸고 여론은 찬반 양상을 띠고 있는 중이다. 이미 수십 년 동안 국보 1호를 유지한 만큼 단번에 이를 변경하면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과 화재로 인한 소실, 부실 복원 등으로 인해 문화재적 가치가 떨어졌으니 국보 1호 해제를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국보 1호 해제론의 대표적인 근거는 바로 ‘부실 복원’이다. 지난해 복원이 완료된 숭례문은 복구 완공 기념식을 가진 지 1개월도 안 돼 단청이 벗겨지는 현상이 발견됐다. 이어 2층 문루의 동쪽 기둥이 위아래로 1m 이상 갈라져 있다는 사실을 포함해 복원된 기둥과 서까래 곳곳에서 균열 현상이 포착되면서 부실 복원 논란이 본격화됐다. 여기에 숭례문 복원 공사를 총지휘했던 신응수 대목장의 ‘소나무 바꿔치기’ 의혹까지 불거지자 숭례문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문화재계 인사는 “냉정하게 말해 지금 건물로만 보자면 국보로서의 가치가 없다”라고 전했다.
홍예문 천장에 그려진 용의 발톱이 왕을 상징하는 5조룡이 아닌 4조룡으로 잘못 그려졌다는 지적도 일고 있다. 임준선 기자
화재로 소실된 문화재의 경우 문화재 지정을 해제할 수 있다는 원칙도 숭례문의 국보 지위를 흔들리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2층 누각 일부가 화재로 소실된 경우라도 전체적인 문화재적 가치는 변함이 없다”며 “문화재위원회 심의 결과 국보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의결되어 현재까지 국보 1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고 밝혔다. 숭례문의 국보 지정이 누각 건물뿐만 아니라 성벽, 성문 등의 문화재적 가치를 포함하여 함께 지정한 것이기에 숭례문의 국보 1호 지위는 변함이 없다는 취지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화재를 입어도 국보 1호로 끄떡없던 숭례문이 부실 복원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냉소적인 반응도 이어지고 있다.
한편 숭례문의 국보 1호 해제론과 더불어 ‘국보 1호 교체론’도 거듭 제기되는 중이다. 몸살을 앓고 있는 숭례문 대신 다른 문화재를 국보 1호로 세우자는 주장이다.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것이 ‘훈민정음’이다. 국보 70호인 훈민정음을 국보 1호로 하고 숭례문을 국보 70호로 맞바꾸자는 방안이다. 이밖에 한글을 새롭게 국보로 지정해서 국보 1호로 세우자는 주장도 만만찮다.
2008년 숭례문 화재 현장. 임준선 기자
실제로 숭례문 방화사건 직후 국보 1호 교체론은 정치권에서 심도 있게 논의되기도 했다. 2009년 11월, 18대 국회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한선교 의원이 민주당 강창일 의원 등과 함께 ‘문화재보호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당시 한선교 의원은 “문화재에 훼손이 이뤄질 경우 가치를 상실하는 유물을 국보로 지정하는 것이 아닌 국민 대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한글을 국보 1호로 지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보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힌 바 있다. 이밖에도 숭례문보다 훨씬 역사가 오래된 석굴암이나 불국사, 팔만대장경 등을 국보 1호로 지정하자는 주장도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국보 1호 교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목소리가 크다. 문화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원광대학교 홍승재 건축학과 교수는 “국보 1호를 한글로 교체하면 2호, 3호는 또 어떻게 정할 것인지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문화재를 어떻게 가치를 매겨서 순위를 나누겠는가. 이 부분을 정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문화재위원인 경일대학교 장석하 건축학과 교수는 “문화재적 가치로 순위를 매기면 그 자체로 큰 혼란이 온다. 차라리 문화재를 목재, 석재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눠서 관리번호를 새롭게 지정하면 어떨까 싶다”라고 전했다.
이렇듯 국보 1호 해제론에 대한 논의가 일각에서 이어지고 있지만 결론이 도출되기까지는 험난한 길이 예상되고 있다. 찬반 양측의 주장이 팽팽한 것과 더불어 국보 1호의 지위를 보는 일반 시민들의 인식과 문화재계 전문가들의 인식차가 크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문화재위원은 “여론의 경우 국보 1호를 ‘대한민국 대표 문화재’로 인식하는 반면, 문화재청과 전문가들은 ‘단순한 관리번호일 뿐’이라고 입을 모으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문화재관리법상 국보 번호가 단순한 관리번호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수십 년간 숭례문이 국보 1호로 여론에 인식됐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 인식차를 얼마나 좁히느냐에 따라 국보 1호 해제론에 대한 건설적인 논의를 할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