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대희 대검 중수부장 . 그래픽=장영석 기자zzang@ilyo.co.kr | ||
세상의 모든 이목을 재계와 검찰의 힘겨루기에 집중시켜 놓은 상황에서 검찰은 슬쩍 ‘썬앤문 의혹’에 칼을 들이댔다. “걸리는 것은 다 친다”는 이른바 ‘안대희식 수사기법’이라고 하기엔 그 타이밍이 너무나도 절묘했다.
이렇게 해서 사실상 야당이 내세운 세 가지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 수사는 모두 검찰에 접수됐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단연 대검 중수부와 안대희 부장이 있다. “이미 ‘안 특검팀’이 가동중인데 또 무슨 특검팀이요?”라는 농담이 나올 정도로 중수부는 여유를 부리고 있다.
지난 11월18일 한국과 불가리아의 축구 대결은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대검청사 내에서도 화제로 떠올랐다. 당시 검찰 내 한 직원은 재미있는 비유를 했다.
“항간에서 쿠엘류호를 중수부에, 히딩크 전 감독을 특검에 비유한다더라. 쿠엘류로 도저히 안되겠다는 여론이 형성되면 축구협회에서는 히딩크 카드를 내세울 것이라나. 툭하면 히딩크 운운하는 국내 여론에 대해 쿠엘류는 자존심을 많이 다쳤을 것이다. 쿠엘류는 만약 지더라도 내년 아시안컵까지는 버티고자 할 것이다. 쿠엘류에게 최악의 상황은 임기 전에 경질되는 것이고, 재복귀한 히딩크가 다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이다.”
결국 그날 축구경기에서 한국은 졌다. 그러나 여론의 반응은 의외였다. “지금 잘하고 있으니 계속 쿠엘류에게 믿고 맡겨보자”는 쪽이었다.
지난 11월10일 국회에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특검법이 통과되면서 일부 성급한 이들은 벌써부터 새 특검 후보를 거론하기도 했다. 새로 출범할 ‘5호 특검팀’에 대한 밑그림이 한창이었다.
만약 5호 특검팀이 출범한다면 크게 세 팀으로 나뉘게 된다. 1팀은 최도술 전 비서관의 대선 관련 불법자금 모금 의혹을 맡게 되고, 2팀은 썬앤문 그룹과 이광재 전 실장이 관련된 불법자금 의혹을, 그리고 3팀은 양길승 전 청와대부속실장의 불법자금 수수 의혹을 각각 맡게 된다. 각 팀의 팀장에는 세 명의 특검보가 각각 포진하게 되고 그 총괄을 다섯 번째 특별검사가 맡게 된다. 역대 최대 조직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선수’는 대검 중수부에서 먼저 치고 나섰다. 현재의 대검 중수부 조직은 특검팀 조직 플러스 알파의 형태로 구성되고 있다. 중수1과가 최도술 비리 등을 포함한 대통령측근 비리를, 중수2과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선자금 비리를, 그리고 이인규 원주지청장을 비롯한 차출팀이 대기업 비자금 수사를 각각 전담 마크하고 있다.
여기에 공적자금 비리 수사를 담당했던 중수3과에서 최근 썬앤문 자금 의혹에 대해 수사에 돌입했다는 내용이 불거지고 있다. 현재 양길승씨 관련 수사는 청주지검에서 계속 진행중이다.
대검 관계자에 의하면 “보통 대검 중수부의 경우 전체 인원이 70~80명 선인데, 지금은 차출된 인원을 다 합치면 아마도 1백80명선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최근 검찰 주변에 떠돌고 있는 얘기가 “앞으론 정치권에서 함부로 특검의 특자도 못 꺼내게 해야 한다”는 이른바 ‘특검 김빼기’ 주장이 있다.
최근 썬앤문 사건에 검찰의 칼날이 드리워진 것에 주목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검에서는 “금융정보분석원이 수사를 의뢰해왔고, 그 내용이 공적자금에 해당된다고 보기 때문에 거기에서 수사토록 한 것뿐”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썬앤문 사건이 드림팀에 포함된 것은 다분히 특검을 의식한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대검 관계자는 “검찰 내에서는 썬앤문건에 대해 사실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니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이광재 전 실장을 거론하며 특검 수사 범위에까지 올리는 등 뭔가 있는 것처럼 자꾸 부풀리니까 검찰 내에서도 ‘괜히 수사를 피하는 것 같은 오해를 살 필요가 뭐가 있느냐’하는 요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정치권이 특검 공방으로 ‘핑퐁게임’을 계속하는 동안 검찰은 당초의 격앙된 분위기에서 최근 짐짓 여유를 찾은 것처럼 보인다. 이젠 취재진을 상대로 제법 구체적인 일정까지 제시하며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대선 비자금 수사가 언제까지 갈 것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안 중수부장은 지난 11월22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11월 말까지 소환조사를 마무리 지으면, 늦어도 12월 초엔 영장 청구의 사법처리 수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는 말미에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수사팀들이 너무 고생이 많다. 무슨 일이 있어도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일주일간은 휴가를 줄 생각”이라는 것. 12월 중순이면 대기업 수사가 끝난다는 암시였다.
▲ 중수부에 합류한 이인규 지청장. | ||
여기서 주목할 것은 검찰이 밝힌 수사 일정. 기업 수사를 먼저 정리한 후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대한 수사에 칼을 들이대겠다는 복안이 그것.
정치권 전반의 비자금 문제에 대해서는 “외국의 경우 그런 수사는 통상 1~2년이 걸리기도 한다. 단시일에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는 입장을 슬며시 흘리고 있다. 재계 수사와 정치권 수사의 성격을 명확히 달리 하겠다는 뜻이다.
당초 검찰이 LG그룹에 칼을 들이댈 때만 해도 정·재계에선 재벌 압박용일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압박 차원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검찰의 초강수는 특검도입 여론을 주춤하게 만들었고, 그 틈새를 노려 검찰은 사실상 특검수사 범위를 모두 장악했다.
검찰 안팎에선 이에 대해 송광수 총장은 정치권 방패막이 역할을, 안 부장은 기획을, 그리고 일선검사들은 행동대 역할을 맡는 삼위일체가 이뤄지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실제 특검을 주장하는 정치권에 대한 검찰의 반발은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이다. 한 검사는 기자에게 노골적으로 “정치인들 때문에 나라 꼴이 아주 엉망이 되고 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린다”고 직격탄을 퍼부었다.
검찰의 정치권에 대한 불신은 지난 8월 고 정몽헌 회장 자살사건 이후 극에 달했다. 정치권은 이 죽음의 실체가 검찰의 강압수사 때문인 것으로 밀어붙이려 했다는 것. 여기에 재계 역시 정치권 뒤에 숨어 사실상 ‘검찰 죽이기’에 무임승차하려 했다는데 대해 일선 검찰들은 상당히 울분을 토로했다.
당시 격앙된 분위기였던 중수부는 송광수 총장의 “검사는 수사로 말한다”는 다독거림 속에 이를 갈며 현대 비자금과 SK비자금을 파헤쳤다. 현재의 대선 비자금 수사도 여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
지난 11월4일 이인규 원주지청장팀의 가세는 검찰의 결연한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난 8월 전보 발령이 나기 전까지 서울지검 금융조사부에서 LG의 부당내부거래 및 지분관계 변동에 대해 광범위한 내사를 진행했던 이 지청장의 가세는 정치권에 칼을 들이대기 위한 ‘칼갈이’ 역할로 최적격이었다.
현재 검찰이 수사중인 사안에 대해 정치권에서 특검을 도입하겠다고 나서자 검찰은 다시 한 번 울컥했다. 정치권이 또 흔든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검찰도 정치적인 습성을 배우고 있다. 정치권에 대한 맞대응은 같은 말싸움보다는 침묵 속의 강압수사가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간파한 중수부는 LG에 이어 삼성을 후속 타깃으로 잡고 행동에 옮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