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어깨동무’ 오늘은 ‘멱살잡이’
허창수 전경련 회장(왼쪽)과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이 ‘중소기업 적합업종 재지정’을 놓고 힘겨루기를 본격화했다. 사진은 지난해 8월 ‘한국 산업생태계의 변화와 미래성장’ 세미나에 참석한 두 회장의 모습. 연합뉴스
서전에서는 일단 허창수 회장의 전경련이 승기를 잡은 모양새다. 동반성장위원회가 지난 11일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 운영개선 방안을 발표하면서 대부분 전경련에서 제기해온 의견들을 대폭 반영해줬다. 하지만 중기중앙회를 필두로 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단체들은 집단 반발하며 물리력 행사까지 벼르고 있다. 양측 간 전투가 치열해질 경우, 취임 초 ‘중소기업 대통령’을 자처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나설 수도 있다. 누구도 최종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셈이다.
중소기업 적합업종제도는 ‘골목 상권’ 보호와 육성을 위해 지난 2011년 9월 도입됐다. 특정 품목에 대해 대기업의 진입을 막아 중소기업의 성장을 돕는다는 취지다. 지난 3년간 100개 품목이 적합업종으로 지정됐는데 오는 9월 14개, 11월 23개, 12월 45개 등 총 82개 품목이 올해 안에 지정 기간이 종료된다. 향후 신규 지정 품목으로 28개가 검토되고 있다. 동반위의 운영개선 방안은 신규지정이나 재지정에 기준을 일단 대기업에 유리한 쪽으로 정해준 것이다.
동반위는 중소기업 적합업종 선정 시 일부 중소기업의 독과점 가능성, 국내 대기업의 역차별이나 외국계 기업의 시장 잠식 가능성, 전후방 소비자에 미치는 영향, 시장 성장 가능성 등을 적합성 검토 단계에서 따지도록 했다. 고속 성장 업종으로 대·중소기업 간 자율 경쟁이 필요한 업종, 대기업이 사업을 철수해 중소기업의 사업 영역이 보호받고 있는 업종, 중소기업이 실제로 피해를 본 사실이 없는 업종은 해제 검토 대상이 된다.
전경련 회관 전경. 박은숙 기자
이러한 방침이 나오자 중소기업들은 ‘대기업 편들기’라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중기중앙회는 당장 “이번에 마련된 적합업종 가이드라인은 일각의 왜곡된 주장으로 인해 변질돼 무리하게 적용될 수 있다”면서 “향후 가이드라인 적용에 있어 동반위는 그 기준과 적용방법, 그리고 사실 관계를 명백히 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할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소상공인연합회, 한국외식업중앙회, 대한제과협회, 세 단체도 이날 동반위에 “적합업종을 원안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 의견서를 전달했다. 일부 소상공인들이 적합업종 신규 지정이 좌절될 경우 대규모 규탄집회를 비롯한 실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개선 방안이 적합업종에서 일부 품목을 해제하기 위한 것이 돼선 안 된다”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자율 합의를 위한 참고 사항으로만 활용돼야 한다”고 못 박았다.
사실 대·중소기업 간 상생은 전경련이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우는 가치다. 균형성장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늘자 전경련이 기업이 지향해야 할 가치 중 하나로 삼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동반성장이 화두로 등장하면서 기업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갔던 정책이 이제는 필수적 경영요소로 자리 잡은 것이다. 대기업 대표단체인 전경련이 중소기업센터를 두고, 사회공헌과 함께 동반성장 활동을 강화한 이유다. 불미스런 일들로 재벌 총수들이 줄지어 법정에 서게 되는 상황에서 대기업에 대한 싸늘한 시선을 순화시킬 수 있는 방편이기도 하다.
대기업들에게는 동반성장의 실적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척도로 자리 잡았다. 동반성장위원회가 발표한 동반성장지수 성적표를 받아든 대기업들 사이에 희비가 엇갈릴 정도다. 최고의 기업으로 평가받은 기업은 삼성전자, 삼성전기, 포스코, 기아자동차, 삼성SDS, 코웨이, 현대미포조선, 현대삼호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제철, KT, SK C&C, SK종합화학, SK텔레콤, 모두 14곳이다. 특히 삼성전자, 삼성전기는 3년 연속 최상위 등급을 유지하면서 ‘명예우수기업’으로 선정됐다.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든 기업들 중에는 유독 유통과 식품분야 기업들이 많다. 홈플러스의 경우 3년 연속 최하위 등급을 받으면서 동반위가 동반성장지수 운영기준에 따라 동반성장 컨설팅 지원 대상이 됐다.
유통·식품 기업들은 골목상권 보호 차원에서 시행 중인 중소기업 적합업종 대상 지정과 대형마트 강제휴업의 ‘피해자’들이다. 이들이 동반성장에 미온적인 일 수밖에 없는 것이 기업 생태계다. 하반기에 품목별로 재지정 심사가 진행되면서 양측 간의 힘겨루기가 본격화되고, 영역전쟁이 본궤도에 오를수록 허창수 전경련 회장과 김기문 중기중앙회 회장의 고민도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