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대해 애써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그가 지난 3월12일 대통령 탄핵안 가결 이후 상당히 달라졌다는 것이 법무부 주변의 중론이다. 예의 그 알듯 모를 듯한 미소나 웃음도 없어졌고, 미술이나 영화를 얘기하던 다정한 소녀적 감상도 사라졌다고 한다.
야당측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인단 간사는 문재인과 강금실 두 사람”이라고 공격할 정도로 탄핵 정국에서 보여주고 있는 그의 행보는 사뭇 노골적이다. 일각에서는 “장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린 듯하다”며 전격 사퇴설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 3월19일 오전 강금실 법무장관과 문재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만난 것으로 확인됐다. 법무부측은 이날의 만남에 대해 “문 전 수석의 퇴임 이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 인사차 만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 시점에서 두 분의 공개적 만남이 또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만큼 조심스럽게 만난 것이 아니겠느냐”는 입장을 나타냈다.
하지만 이날의 만남이 처음이 아닐 것이라는 얘기가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여권의 한 인사는 “두 사람은 총선 차출 과정에서도 똑같이 불출마 의사를 서로 고수하는 등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민변 시절부터 두 사람은 각각 부회장과 부산·경남 지부장을 맡으면서 성향도 맞고 서로에 대해 존경과 신뢰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문 전 수석이 변호인단 간사로 사실상 내정된 것은 지난 14일. 그 이후 문 전 수석은 서초동에 사무실을 내고 변호인단 구성을 위해 연일 바깥 나들이를 하는 등 법조계 인사를 만나는 데 모든 일정을 쏟고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시기에 강 장관의 행보 또한 공식회의 이외에는 청사 바깥 나들이가 많았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강 장관은 탄핵안이 가결된 직후인 12일 저녁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에게 “쉬면서 뮤지컬 ‘슈퍼스타 예수 그리스도’를 봐라. 요즘 대통령 심경을 대변해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국무위원과의 마지막 간담회에서 나온 가벼운 화제였으나 이는 대통령에게 어떤 순교자의 모습까지 요구하는 자못 비장한 주문이기도 한 셈이었다. 다음날인 13일 문 전 수석이 급거 귀국, 청와대를 방문했다.
일요일을 보낸 다음 두 사람의 행보는 지난 15일부터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시작했다. 문 전 수석은 서초동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사실상 노 대통령 변호인단 간사로 공식적인 행보를 내디뎠다.
강 장관의 행보가 가장 두드러진 날도 역시 지난 15일이었다. 강 장관은 이날 열린 ‘공명선거 관계장관회의’에서 상당히 강력한 어조로 “총선은 4월15일 예정대로 실시된다”는 확인을 했다. 이는 사실상 야당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총선 연기 음모를 원천 봉쇄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날 강 장관은 강력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대통령 탄핵소추 의견서를 곧 헌재에 낼 생각이며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한 직무 범위에 대한 법률 검토 작업을 하겠다”는 뜻이 그것. 이런 그의 발언은 “국회가 스스로 탄핵안을 철회하는 것이 옳다”, “고 대행의 업무는 통상적 범위에서 그쳐야지 개각이나 인사는 부적절하다”는 등으로 소개되면서 야당측에 의해 ‘노빠 장관’으로 맹공을 당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 16일부터 19일까지 강 장관의 행보에 대해 법무부는 “공식업무 이외의 장관 일정까지 파악하거나 알려주는 것은 관례에 없던 일”이라는 입장을 나타냈다. 현재 확인된 바로는 강 장관이 이 시기에 과천의 법무부 청사가 아닌 광화문 종합청사에서 국무회의를 갖거나 대책회의를 가지는 등 공식 일정을 소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16일과 18일 오전에 두 차례 공식회의에서만 강 장관은 모습을 드러냈다.
강 장관의 평소 업무스타일은 공식 행사가 없을 때에는 과천의 법무부에 주로 머무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이 기간에 강 장관은 주로 외부인사를 만나거나 또는 청사 바깥에서 오는 23일 헌재에 제출할 법무부의 탄핵소추 관련 의견서를 준비한 것으로 추측된다.
야당측의 의심은 지난 16일부터 사실상 이 의견서 등을 이유로 강 장관과 문 전 수석이 수시로 통화하거나 비밀회동을 가졌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 한 번의 만남이 이번에 언론에 의해 노출됐다는 것. 민변출신 변호사들의 대거 회동설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면면을 드러내고 있는 대통령 변호인단 구성이 당초 민변 인사 위주에서 상당부분 외부 인사로 옮겨가고 있는 점이 눈길을 끌고 있다.
일각에선 문 전 수석에게 “탄핵 반대 여론이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민변 출신들만으로 변호인단을 구성할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을 강력히 개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런 의견에 강 장관의 뜻도 반영됐을 것이란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초 예상됐던 변호인단에는 이른바 강 장관과 가장 친한 변호사 ‘3인방’으로 알려진 이석태 백승헌 조용환 변호사 등을 비롯, 후원자격인 최병모 전 특검도 활발히 거론됐으나 이들은 대부분 막판 조율에서 빠졌다. 이 역시 최근 강 장관에 대한 행보를 예의주시하는 야당측의 공세를 피해가기 위한 것으로 풀이하는 시각이 우세하다.
이에 대해 민변의 한 관계자는 “우리는 굳이 대통령 변호인단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이번 탄핵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민변 차원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나타낼 것”이라며 “대통령이 민변 출신이라고 해서 마치 우리는 무조건 대통령의 입장만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일부에서 이번 탄핵 대결을‘민변 대 헌변(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 모임)’의 대결구도로 몰아가고자 하는 시각을 경계했다.
그는 최근 강 장관의 민변 인사 접촉설에 대해서도 일축했다. 하지만 강 장관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또다른 한 변호사는 “법무부의 공식적인 의견서를 작성함에 있어서 강 장관이 평소 신뢰하는 변호사에게 법률적 자문
을 당연히 구할 수 있는 것이며 거기에는 민변 출신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의견을 나타냈다.
여권 일각에서는 강 장관의 거침없는 행보를 두고 장관 사퇴설이 나오기도 했다. 야당측이 노 대통령에 이어 강 장관의 해임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선다면 그가 전격적으로 사퇴할 가능성도 있다는 것.
이미 여권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선거 막판 최대 위기에 봉착하게 되면 최후의 수단으로 대표적 전략 지역인 수도권과 부산·경남에 각각 강 장관과 문 전 수석을 선거운동원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시나리오가 떠돌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강 장관의 언행이 계산된 행보라기보다는 평소의 성향대로 주변 눈치 보지 않는 그의 성격 탓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지금 노 대통령이 다시 펼쳐들고 있다는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 대해 강 장관은 지난 2001년 대한변협 칼럼에서 ‘이순신은 정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에 정치가 그를 두려워했다’고 쓴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