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법무부 시계’는 돈다
▲ 노태우씨(왼쪽)와 전두환씨. | ||
육사 동기로 친구 사이에 나란히 대통령이 되는 등 전씨와 노씨는 공통점이 많다. 특히 1997년 내란·외환 및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함께 구속돼 중형과 2천억원대의 추징금을 선고받은 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최근 드러나고 있는 비자금 은닉 방식과 기술 수준에서는 둘이 많이 달라 보인다.
전씨는 추적이 어려운 채권이나 부동산 형태로 비자금을 숨겨 놓은 반면 노씨는 발견이 어렵지 않은 가차명 계좌에 넣어두거나 주변 기업인들에게 맡겨두는 방식을 활용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전씨는 ‘프로’급인 반면 노씨는 ‘아마추어급’”이라는 말로 둘의 차이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두 전직 대통령은 대법원에서 비슷한 액수의 추징금(전씨·2천2백5억원, 노씨·2천6백29억여원)을 선고받았지만 이 가운데 국고에 환수된 것은 전씨는 5백33억여원에 불과한 반면 노씨는 2천92억여원이나 된다. 추징률이 24.1% 대 79.6%로 3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것이다. 어쨌든 검찰과 양 전직 대통령과의 비자금을 둘러싼 숨바꼭질은 1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전두환씨의 차남 재용씨의 은닉 비자금이 폭로돼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더니 최근에는 노태우씨 차례가 돌아온 듯하다. 대검 중수부는 지난달 말 노씨가 ‘이두철’이란 가공의 인물 명의로 은행 계좌에 숨겨 놓았던 비자금 73억9천만원을 찾아냈다.
이 계좌는 1993년 만들어진 것으로 검찰이 찾아내는 데는 시중은행의 제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계좌가 만들어진 지 10년 이상 거래가 이뤄지지 않자 은행이 계좌정리에 나섰고 예금주인 ‘이두철’이 유령 인물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에 은행측은 검찰에 제보를 했고 검찰은 액수로 보아 양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두 달간 수사를 벌였다. 결국 노씨 비자금 실무 관리인 등에게서 노씨 돈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고, 노씨도 순순히 이를 인정했다.
노태우씨는 이번에 확인된 것처럼 비자금을 주로 금융기관의 가차명 계좌를 이용해 숨겨 왔다. 먼저 검찰은 추징금이 선고된 지 1년 만인 1998년 10월 신한은행 등 3개 금융기관의 가차명 계좌들에서 무려 1천3백29억원을 찾아내 국고로 환수했다. 이어 2001년 2월에는 나라종금에 차명 예탁된 2백48억원이 발견되기도 했다.
검찰은 또 같은 해 노씨 비자금 2백억원을 관리했던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을 상대로 추징금 반환청구소송을 벌여 66억7천만원을 압류했다. 비자금을 건네받은 노씨의 사돈 신명수 신동방 그룹 회장과 동생 재우씨를 상대로도 한 3백억원 반환청구 소송에서도 이겼다.
이처럼 ‘찾기 쉬운’ 곳에 숨겨놓다 보니 노씨는 비자금의 상당 부분이 국고에 환수되는 처지가 됐다. 검찰은 또 이번에 찾아낸 73억여원 외에 노씨의 비자금으로 의심되는 10억여원 규모의 계좌를 더 찾아내 확인작업을 벌이고 있다.
노태우 비자금에 비해 전두환 비자금에 대한 추적 작업은 진전 속도가 꽤나 느린 편이다. 검찰은 97년 판결 직후 3백12억원을 추징한 이후 2001년 전씨 소유 승용차와 아들 명의 콘도회원권, 가재도구, 연희동 자택 별채 등을 경매한 몇 푼을 추가로 건졌다. 이후 전씨는 금융자산이 예금 29만원뿐이고 더 이상의 재산은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그러던 중 대검 중수부는 지난해 대선자금 수사를 위해 사채시장을 샅샅이 뒤지다 전씨의 차남 재용씨 명의의 국민주택채권 1백67억원어치를 찾아냈다. 이후 수사가 추가로 진행되면서 이순자씨가 관리하던 1백30억원과 기타 친인척·측근 관리자금까지 총 3백73억원이 더 나왔다.
▲ 전두환 본인 명의 땅을 발굴, 최초 보도한 <일요신문> 표지. | ||
이어 검찰은 지난해 11월 <일요신문>이 찾아낸 전두환씨와 장인인 고 이규동씨 공동 명의의 서울 서초동 일대 땅(도로) 중 전씨 지분(51.2평)에 대해 압류절차를 밟고 있다. 이 땅은 평당 1천만∼1천5백만원 정도여서 압류절차가 마무리되면 5억∼7억원 정도가 추가로 추징되는 셈이지만 도로로 사용되고 있어 실제 경매가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이처럼 전씨측은 비자금을 주로 추적이 어려운 무기명 채권이나 친인척, 부동산 등에 은닉하고 있어 검찰이 찾아내는 데 애를 먹고 있다. 지난해 찾아낸 무기명 채권도 대선자금 수사중 그야말로 ‘운이 좋아’ 걸려든 것이다.
검찰은 일단 전두환씨의 비자금 은닉처로 친인척들을 의심하고 있다. 실제 장남 재국씨는 시공사 등 거대 출판 그룹을 운영하며 1백50억원대의 부동산까지 갖고 있는 준재벌급으로 알려져 있다. 또 동생인 전경환씨도 지난해 1백50억원어치의 명의신탁 재산과 수백억원대의 해외채권에 연루돼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여기에 처남인 이창석씨도 1백억원대의 재산가로 알려져 있고 실제 2003년 11월 전씨의 연희동 자택 별채 경매 때 감정가의 2배가 넘는 16억4천8백만원으로 낙찰받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들 친인척들에 대해서는 아직 전씨 비자금과 연결되는 구체적인 단서가 없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검찰 주변에서는 전두환씨의 비자금 상당 부분이 해외 부동산이나 해외 은행 계좌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그렇게 되면 비자금에 대한 환수는 더 더욱 어려워지는 것이다.
검찰은 노태우씨 소유의 부동산 6건을 비자금을 수사중이던 1995년에 발견하고도 추징시효 연장용으로 아직 국고로 환수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추징시효 기간인 3년 내에 환수할 새로운 비자금을 찾아내지 못하면 추징시효가 완성돼 더 이상 추징할 수 없게 되는 사태를 막기 위한 방편이다. 이처럼 비자금 환수를 위해 양 전직 대통령측과 머리싸움까지 벌이는 검찰이 과연 앞으로 얼마나 더 비자금을 찾아낼지 주목되고 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