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 정희자씨가 20년 장기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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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9년 힐튼호텔은 김우중 전 회장의 손을 떠났지만 최상층 펜트하우스는 여전히 부인 정희자씨가 장기임대 형식으로 ‘지키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 ||
그 대표적인 곳으로 호텔 맨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는 ‘펜트하우스’가 주목받고 있다. 이곳은 김 전 회장이 10여년 이상 대우 그룹을 진두지휘한 사실상의 사령부였고, 궁지에 몰린 그가 99년 10월 마지막 출국을 하기 직전까지도 머물렀던 최후의 보루였다.
대우가 몰락한 지 6년이 다 되어가지만 이 펜트하우스는 여전히 대우의 역사를 간직한 채 남아 있다. 최소한 2백억원 이상의 재산가치를 평가받는 초호화의 상징 펜트하우스와 빈털터리 신세가 됐다는 김 전 회장의 초라한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오버랩되고 있다. 바로 여기에 펜트하우스의 비밀이 숨어 있다. 펜트하우스는 과연 지금 어떤 상태로 남아 있을까.
기자가 힐튼호텔을 직접 찾은 것은 6월23일 오후. 1층 호텔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올라갈 수 있는 최대층은 22층으로 한정돼 있었다. 22층에서 내려 호텔 관계자에게 “위층을 올라갈 수 없느냐”고 물었으나 “22층이 제일 위층이고 그 위는 옥상”이라고 대답했다.
22층 복도 한 켠에 ‘헬기착륙장’으로 통하는 비상구를 발견했다. 이곳에 23층과 24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다른 여느 비상구와는 달리 오래됐지만 제법 고급스런 카펫과 장식이 있는 것으로 봐서 펜트하우스로 연결되는 통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역시 23층과 24층으로 나가는 현관 문은 굳게 잠겨져 있었고, ‘출입을 금한다’는 안내 문구만이 하나 붙어 있었다.
호텔 지하에 위치한 관리부서 사무실을 찾았다. 호텔의 한 임원은 “펜트하우스에 대한 궁금증은 우리 호텔 관계자를 만나봐야 정확한 답을 구하기 어렵다. 대우가 완전히 망하기 전에 김 회장측이 업무상 필요하다며 펜트하우스만 남기고 매각한 탓에 현재 그런 좀 이상한 모양새로 남아 있는 것 뿐”이라고 밝혔다.
김정기 홍보부장은 “엄격히 말하면 우리 호텔에서 현재 장기임대를 해준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밝혔다. 그는 “우리 호텔은 22층까지만 사용하고 있으며, 그 위층은 누가 쓰는지, 또는 쓰고 있는지 관심도 없고 간여할 사항도 아니다”라며 “내가 알고 있기로는 대우측에서도 현재 그 방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김 회장 부인인 정희자씨((주)필코리아리미티드 회장)가 호텔에 왔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호텔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펜트하우스(Penthouse)는 호텔 전문 용어로 일반적으로 ‘호텔의 최상층에 꾸민 특별 객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일반 투숙객들과의 접촉을 꺼리는 그야말로 VIP 고객만을 위한 시설로서 일부 호텔에서는 최상류층 특별 고객이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힐튼호텔과 같은 국내 특급호텔의 펜트하우스들은 대개 하루 이용료만 1천만원 내외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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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은 지난 16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되는 김우중씨. 오른쪽은 지난 8일 인천공항을 통해 유럽으로 출국하는 정희자씨. | ||
그렇다면 ‘방치’의 이유는 뭘까. 호텔측은 “우린 빌려주었기 때문에 우리가 간여할 바가 아니다”라는 공식 입장을 밝히고 있다. 현재 펜트하우스를 임차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주)필코리아리미티드사의 한 관계자는 “펜트하우스에 대해서는 우리 직원들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항이다. 윗 분들에게 물어봐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 회사의 정 회장과 유진무 사장 등은 현재 모두 출장중이라며 통화가 어렵다고 했다.
힐튼호텔 김정기 부장은 이와 관련해 “계약기간이니 조건이니 하는 구체적 사항들은 99년 6월 호텔 매각 당시 양측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사항”이라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최근 김 전 회장의 귀국에 따른 수사가 이어지자 주변에서 다시 힐튼호텔 매각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즉 대우가 자구 노력의 일환으로 외국 자본에 매각했다는 힐튼호텔은 실제로는 위장 매각한 것이며 DJ 정권이 끝나면 연리 5%를 계산해주고 다시 되사는 조건의 이면계약을 맺었다는 것. 또한 김 전 회장이 자신의 집무실로 사용했던 24층 펜트하우스를 넘기지 않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당시 힐튼호텔의 매각 작업에 직접 참여했던 대우의 전직 고위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매각 협상 당시 펜트하우스 문제로 엄청 골치를 앓았다. 펜트하우스만 빼고 다 매각하겠다고 하자 매입자측에서 ‘그런 게 어딨느냐’고 반발한 것이다. 하긴 당연한 반발 아니겠는가. 건물을 팔면서 꼭대기층만 빼고 판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고…”라며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일각에서 제기하는 위장 매각설에 대해서는 부인했다. 부인 정 회장이 당시 힐튼호텔 매각이 결정되자 대성통곡을 했을 정도로 크게 상심했던 탓에 이에 대한 미안함으로 김 전 회장이 “반드시 다시 되사오겠다”는 뜻을 피력한 것이 와전된 것일 수도 있다는 것.
하지만 이 관계자는 ‘이면계약’에 대해서는 일부 그 실체를 인정했다. 그는 “당시 호텔 매각에 대해 경쟁입찰을 했는데 입찰 조건에 펜트하우스는 제외한다는 사항이 걸림돌이 된 탓에 인수자들이 잘 응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입찰 조건에서 그 사항을 뺐다. 그리고 인수자가 나선 다음에 이면에서 다시 협상을 했다. 결국 수의 계약의 이면계약 형식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처음에 김 회장은 (자신이) 펜트하우스를 무기한 임대하겠다고 했다. 또다시 저쪽에서 반발했다. 결국 20년 장기임대 계약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펜트하우스를 20년간 장기임대하기로 했다는 계약 조건은 대우 관계자의 입을 통해서는 처음 밝혀진 것이다. 특히 이 같은 증언들은 지난 DJ 정권 당시 정보기관에서 떠돌던 위장 매각 의혹 속에 포함된 ‘이면 계약설’과 ‘20년 장기임대 계약설’과 일치하고 있어 주목된다.
김 전 회장이 대우 몰락의 위기를 맞은 절박한 상황에서까지 그토록 펜트하우스를 유지하는 데에 집착을 보인 점에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대우의 한 전직 임원은 “김 회장은 99년 10월 마지막 출국 직전까지 펜트하우스에서 대우 몰락을 막기 위해 밤낮 없이 모든 것을 올인했다. 나도 당시 새벽 2~3시에도 회장의 호출을 받고 펜트하우스로 뛰어 올라가서 업무보고를 하고 회의를 한 적이 숱했다”고 밝혔다.
정가 일각에서는 힐튼호텔 펜트하우스에 대해 김 전 회장이 정·관계 유력 인사들과 친분을 다지고 물밑협상을 시도하던 로비의 산실이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역대 정권의 정·관계 실세들 중에는 펜트하우스에 초청을 받았던 인사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어찌 보면 재벌회장과 유력인사의 ‘밀담의 추억’이 생생히 남아 있는 곳이 바로 펜트하우스인 셈이다.
김 전 회장의 99년 10월 출국이 미리 예정된 도피성 외유가 아니라 당초에는 일시적 출국이었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당시 펜트하우스의 내부 상황에 대한 궁금증도 더해주고 있다. 대우 몰락 당시의 관련 서류나 메모들이 그대로 펜트하우스 내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그것. 대우 사태를 오랫동안 추적해온 한 관계자는 이렇게 추정했다.
“김 전 회장은 99년 10월 당시 곧 다시 돌아올 예정으로 일을 하던 상태에서 서둘러 출국했으나, 결국은 돌아오지 못했다. 물론 해외에서 국내 관계자에게 자신의 집무실을 정리하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이 내밀한 곳까지 직접 정리하진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후 펜트하우스는 주인을 잃은 채 그대로 닫혀졌다. 6년간 닫힌 이 방의 서랍과 금고를 김 전 회장은 자신이 직접 다시 열고 싶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