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날의 검’ 잘못 쥐면 다치는데…
대출로 집을 샀다가 집값 하락으로 낭패를 본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미국의 부동산 투자정책 실패의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였다면 우리나라에선 ‘하우스푸어’를 들 수 있다. 부동산시장 과열기였던 2006년 말 집값이 급등하자, 2007년과 2008년 뒤늦게 매매에 나선 이들 상당수가 이러한 하우스푸어로 전락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부동산 거품이 빠지고 2010년부터 집값이 급락하자 대출금을 갚지 못해, 또는 대출이자조차 감당하지 못해 가난해진 이들이다. 우리나라는 한 차례 이로 인한 홍역을 치렀고, 부동산 투자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겼다. 이후 투자자는 물론이고 실수요자들까지 집을 사는 것을 꺼려하는 심리가 나타났다. 국민 평균 자산의 70%가 부동산인 나라. 전체 대출의 50% 이상이 주택담보대출인 나라. 자칫 하우스푸어로 전락할 경우 온 국민이 가난의 굴레 속에 빠져들 수 있어서다.
최근 정부부처와 정치권, 금융계를 중심으로 총부채상환비율(DTI)과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완화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 서울 송파구 잠실2단지의 아파트 상가 부동산 중개업소에 붙어있는 아파트 매매·전세 시세.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최근 이 같은 트라우마에서 조금씩 벗어나려는 모습이 포착되고 있다. 부동산 투자에 대한 논의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총부채상환비율(DTI)과 주택담보대출비율(LTV) 완화에 대한 목소리다. 이는 주택을 사기 위한 대출액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를 규정하는 기준들로, 비율을 정해놓았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규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근 정부부처와 정치권, 금융계를 중심으로 이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두 대출 규제를 완화하자는 것과 반대로 그대로 둬야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이는 주택을 상품의 하나로 보느냐, 주거 개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 정책 우선순위가 금융 쪽인 부처냐, 부동산이냐에 따라 시각이 갈릴 수 있는 문제다.
현재는 완화 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집을 사면 하우스푸어가 될 수 있다’는 심리를 일종의 트라우마로 해석, 여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 크기 때문이다. 이들은 올해 하반기에도 경기회복이 연초에 기대했던 만큼 이뤄지지 않을 것이란 예측들이 나오자 최소한 부동산 경기가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서둘러 대출규제를 완화하자고 말한다.
여기에 불씨를 당긴 장본인은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다. 그는 기재부 장관에 지명되자마자 “DTI와 LTV는 한겨울에 한여름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대출규제로 집값을 조정하는 시기는 지났다는 의미다.
최 후보자는 은행과 비은행 간 업권별 차등, 지역별 차등의 합리화, 상환능력별 규제 합리화를 ‘3대 조정 원칙’으로 제시했다. 규제완화 필요성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그동안 LTV와 DTI를 손대지 않겠다던 금융위원회도 최근 조정 작업에 나섰다. 정부도 우선 지역별로 다르던 LTV와 DTI 규제를 각각 통일시킬 계획이다.
주택가격을 담보로 빌릴 수 있는 대출액 비율을 말하는 LTV는 현재 서울·수도권이 50%(비은행은 60%), 지방은 60%(비은행은 70%)로 규정돼 있다. 소득 대비 대출가능액(매년 갚을 수 있는 원리금)을 제한한 DTI는 서울 50%, 인천·경기는 60%지만 지방은 제한이 없다. 최근 지방 집값이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보다 많이 오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정부는 현재 LTV 지역 차별을 없애고 비율도 완화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0일 오전 금융통화위원회 정례회의 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DTI와 LTV는 순기능도 있고 역기능도 있다”며 “도입 후 주택거래를 제약하는 측면은 있으나 가계 재무 건전성이라든가 은행의 자산 건전성 측면에서 순기능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그는 “조정할 때는 순기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정은 하되, 깐깐한 잣대를 들이대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외에 ‘DTI 규제 보완방안’의 종료 시기를 올해 9월에서 내년 9월로 1년 연장하는 방안도 유력해지고 있다. 현재는 40세 미만 무주택 근로자가 주택을 구입하면 향후 10년간의 예상소득을 DTI 산정에 반영하고 있다. 소득은 없지만 자산이 많은 은퇴자의 순자산을 소득으로 환산해 인정하는 방안도 연장될 것으로 보인다.
DTI와 LTV 규제완화로 가장 수혜를 입게 되는 곳은 서울 강남지역이다. 강남 3구(강남·서초·송파구)는 자기자본비율이 높고, 주택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 그만큼 대출 금액이 많고 집값 변동폭도 크다. 중대형 주택들도 주택구매력 상승으로 수요가 늘면서 규제완화 효과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대출규제를 완화하면 위축된 부동산 투자심리가 다소 회복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당장 자금여력이 늘어나는 만큼 주택구매 수요가 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부동산의 심리적인 위축을 막고 실수요자가 주택을 구입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장기적으로는 큰 기대를 하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변창흠 세종대 행정학과 교수는 “LTV·DTI 완화는 내수 촉진보다 가계부채 문제를 확산시키는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며 “오히려 하우스푸어 증가로 인한 내수부진을 부추기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LTV나 DTI가 문제가 아니라 서민층의 주거불안 심리를 우선 덜어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대출제한을 풀어줘 젊은층들이 집을 사도록 하는 것보다 향후 안정된 소득 보장, 육아 및 노후불안 해소 등이 우선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참여연대 안진걸 처장은 “부동산 규제의 마지막 노선인 DTI·LTV를 건드리면 주택시장은 물론 금융시장까지 왜곡돼 가뜩이나 위태로운 서민경제를 더욱 추락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수영 이데일리 기자 grassdew@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