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 닮은 상아탑…제 얼굴에 ‘먹칠’
▲ 고려대학교 본관 전경. | ||
이필상 총장의 ‘논문 표절과 총장 사퇴 압력’ 논란으로 사학 명문 고려대학교가 만신창이가 된 가운데 교내 곳곳에서 비판과 자조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일부 교수들은 “연구보다는 학교 행정에 더 관심이 많은 교수들이 학교를 망치고 있다”며 개탄했고, 일부 학생들은 “권력 지향적인 교수님들은 이미 강의와 논문 연구에는 관심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 인사들은 이번 논란을 다루는 언론의 보도 태도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20일 재단에 의해 이 총장이 임명된 뒤 12월 말 모 일간지의 보도로 처음 불거지기 시작한 이번 논란은 일단 2월 9일 이 총장이 “전체 교수를 대상으로 14일까지 전자투표를 통해 신임을 묻겠다”고 밝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하지만 “투표 결과에 상관없이 이미 고대의 상처는 깊어졌으며 교수 사회의 뿌리 깊은 파벌과 알력은 극명하게 노출됐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대부분의 사학들은 재단이 총장 임명권을 갖고 있다. 하지만 100년이 넘는 역사의 명문 사학인 고대에서는 동문의 파워 역시 무시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번 표절 논란을 둘러싸고 일각에서는 “소위 ‘고대 마피아’의 비고대(서울대) 출신에 대한 반격”이라느니, “명문 K고 동문 세력 간의 결탁”이라느니 하는 설이 분분하지만 그 저변에는 결국 재단과 교우회라는 양 축이 자리 잡고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익명을 전제로 한 고대 경영대의 한 관계자는 “대한민국이 망하더라도 ‘고대 동문회’와 ‘호남 향우회’, ‘해병대 전우회’ 등 3대 단체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 시중에 회자된 적이 있다. 나 또한 고대 출신이지만 달리 ‘고대 마피아’란 말이 나오겠는가. 교우회의 지지를 업지 않고서는 총장이 되는 꿈을 꿀 수도 없다”고 밝혔다.
이 같은 분위기는 지난해 11월의 16대 총장 선거와 이후의 최근 표절논란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도 잘 드러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 과정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보자.
지난해 11월 13일. 총장후보 자격심사 투표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전체 교수의 과반수 이상이 당시 현직 총장이었던 어윤대 전 총장을 부적격자로 투표해 그가 탈락하고 만 것이다. 결국 1차 선거를 통과한 이기수 법학 교수와 이필상 총장은 ‘총장후보 추천위원회’의 2차 선거에서도 나란히 1, 2위를 차지, 재단 측에 최종 후보자로 추천됐다.
여기서 잠깐 고대의 총장 선출 과정을 살펴보자. 고대의 총장 선출 방식은 모두 3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1차로 교수단 전체 투표에서 네거티브 선거가 치러지는데, 이는 자격 심사로 총장 부적격자를 가려내는 것. 즉 과반수 이상이 총장 부적격자로 지목하면 그는 총장 후보에서 탈락하게 된다.
1차 부적격 선거를 통과한 후보에 대해서 교수·교우회·학생·교직원 등이 참여하는 ‘총장후보자 추천위원회’가 선거를 통해 두 명의 최종 후보자를 선정하면, 마지막으로 재단이 이사회를 거쳐 한 명을 최종 선출하는 방식이다.
이번 16대 총장 선거에는 어 전 총장과 이 총장, 이 교수 등 유력 후보들이 모두 나선 가운데 어 전 총장이 1차 선거에서 일찌감치 탈락했고 결국 2차 선거(총장후보자 추천위원회)에서 근소한 차이로 이 교수가 1위, 이 총장이 2위를 차지했다. 이에 대해 고대 경영대의 한 관계자는 “5년 전 교수 전체 선거에서는 이 총장이 1위, 이 교수가 2위를 했는데 지난해 말 추천위 선거에서는 근소한 차이나마 거꾸로 이 교수가 1위, 이 총장이 2위를 차지했다. 이를 통해 고대 내부의 지지 성향을 잘 알 수 있다”고 밝혔다.
▲ 표절 논란에 휩싸여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이필상 총장. | ||
실제 당시 교내에서도 교우회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이 교수가 2차 선거 1위를 발판 삼아 총장에 입성하는 것이 아니냐는 예상이 우세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재단인 고려중앙학원은 11월 20일 전체 이사회를 열어 만장일치로 이 총장을 새 총장으로 임명했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고대가 사실상 개교 이래 처음으로 타 학교 출신을 총장으로 맞았다’고 보도하며 이 총장의 강점으로 비교적 대외적 이미지가 깨끗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도 했다. 그러자 학교 내부에서는 이를 다소 못마땅해 하는 비판적 시각이 형성됐고, 일부 세력이 이 총장의 논문 표절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모 일간지의 보도로 촉발된 이 총장 논문 표절 논란에 대해서도 교내에서는 “내부에서 작정하고 제보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이라며 의도적인 언론 유출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많다.
이 총장 사태가 재단과 교우회를 배경으로 ‘친이’ 및 ‘반이’ 세력이 대립하는 양상으로 치달으면서 ‘교수의회’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과거의 교수협의회를 대신하는 전체 교수들의 대표기구 성격을 띤 교수의회가 자체적으로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 이 총장의 논문표절 논란에 대해 조사하겠다고 나선 것. 교내는 물론 외부에서도 교수의회가 제3자의 입장에서 사안의 진실을 가려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물거품이 돼버렸다. 배종대 의장(법학 교수)을 중심으로 한 의장단과 박경욱 경영학 교수를 중심으로 한 일부 대의원이 정면으로 대립했던 것. 의장단은 “이 총장의 논문 표절이 확실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뜻을 밝혔고, 박 교수 등은 “의장단이 중립적이지 못하고 처음부터 논문 표절이라는 단정을 지은 채 내부 자료를 외부에 유출시키고 있다”고 반격했다.
결국 교수의회조차도 편 가르기 양상에 휘말려들면서 이제는 고대 스스로의 자정 능력을 거의 상실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이전투구가 계속되자 결국 이 총장이 ‘전체 교수 신임 투표’라는 카드를 꺼내 든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 공과대학의 한 교수는 “논문 표절 논란에 대한 면죄부를 전체 교수의 인기투표 식으로 해결하려 해서 되겠는가. 설사 상대 측에서 자신의 논문 표절을 정치적 의도로 이용했다고 해도, 이 총장 역시 ‘사퇴 협박’ ‘음모론’ 등을 폭로하며 학교를 이전투구의 장으로 만든 데에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기자가 취재 과정에서 만난 고대 경영대 및 경영대학원 출신의 동문들은 이번 사태를 바라보면서 의미 있는 얘기를 건넸다. 자신을 이 총장의 반대편에 서 있는 모 교수의 제자라고 소개한 A 씨(40)는 “강의보다는 학교 행정에 관심이 더 많은 교수들이 많다. 그에 비하면 이 총장은 학생들 사이에서 강의 실력을 인정받는 교수였다. 논문 표절 논란을 보면서 나를 지도했던 교수를 포함한 다른 교수들은 과연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밝혔다.
정치판을 방불케하는 논란과 파문으로 점철된 이번 사태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대학가의 눈은 다시 고대로 향하고 있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