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묻히고 그들은 무사하다
▲ 2004년 1월 5일 대통령 측근비리 특검 사무소 개소식. 현판 오른쪽 인물이 김진흥 특별검사다. | ||
■ 최도술 SK 비자금 의혹
2003년 10월 7일자 <일요신문>이 단독 보도한 ‘최도술 씨 출국금지 내막’ 기사로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SK 비자금 11억 원 수수 사건의 서막이 올랐다. 최 씨는 같은 달 15일 검찰에 구속됐다.
검찰 수사로 밝혀진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부산상고 선후배 사이인 최 씨와 이영로 씨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된 2002년 12월 19일 저녁 SK그룹 손길승 회장에게 “이번 대선 선거운동 과정에서 진 빚을 메우기 위해 10억 원 정도가 필요하다”며 금품을 요구했다. 물론 향후 새로 출범할 정부가 SK와 관련된 일을 잘 봐주도록 하겠다는 ‘당근’이 제시됐다. 이에 SK 측은 크리스마스인 25일 최 씨에게 1억 원짜리 CD 11장을 건넸다.
여기서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이 씨는 부산상고 45회 출신으로 노 대통령의 8년 선배가 된다. 노 대통령이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고, 대선배로서 깍듯이 모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는 손 회장과는 고향(하동) 초등학교 1년 선후배 사이로 친분이 두터웠다. 이 씨는 부산은행에 근무하며 국제금융부장과 지점장 등을 지냈고 동남은행의 비상임 이사를 지낼 정도의 ‘거물’로 부산지역 증권가에서는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곳간지기’로 인식돼 온 최 씨의 비자금 수수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한나라당은 “SK로부터 받은 11억 원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며 총 300억 원 수수 의혹을 제기하며 특검팀에 수사를 맡겼다. 하지만 특검팀은 “대선 이후 최 씨가 기업들로부터 받은 금품은 SK 11억 원 외에 총 4억 9100만 원이 더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300억 원 수수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특별한 성과가 나오지 않은 탓에 별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당시 특검 수사 결과 가운데 새롭게 밝혀진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이 씨가 기업인들을 상대로 7억 4000여만 원의 불법자금을 받은 사실이 밝혀진 것. 지난해 초 부산상공회의소를 취재하던 기자에게 한 관계자는 “서울에서 잘 몰라서 그렇지 부산 재계 및 금융권에서는 이 씨가 훨씬 더 큰 거물로 통한다. 최 씨는 비교 대상도 못 된다”고 전했다. 최 씨에게 금품이 건너간 것도 중간에 이 씨가 있었기에 용이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처럼 최 씨 비자금 수수 의혹 사건에서 핵심 인물은 오히려 이 씨라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는 SK 비자금 수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인지한 2003년 9월경 뇌경색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가족 측은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밝혔고 병원 측 역시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힘들다”는 소견을 밝혔다. 검찰과 특검은 이 씨에 대한 조사를 아예 하지도 못했다. 최 씨는 법정에서 “모든 것은 이 씨가 다 알고 있다”며 슬쩍 책임을 이 씨에게 떠넘기는 듯한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당시 대검은 특검 수사에서 밝혀진 이 씨의 자금 수수 혐의는 부산지검에 이첩해서 계속 수사토록 하겠다고 밝혔으나 이후 특별히 밝혀진 내용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최 씨는 2004년 11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 6월과 추징금 15억여 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 씨에 대한 추가 조치는 없었고 당시 이 씨를 기소중지하는 것으로 사실상 사건을 종결했다.
▲ 입원 중이던 이영로 씨(위쪽), 이원호 씨 | ||
이 씨의 한 측근 역시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병원에서 퇴원은 했지만 뇌경색이 금새 고쳐지는 병이 아니지 않느냐”면서 “주변에서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는 몰라도 회장님은 아직도 환자다. 바깥출입도 못한다. 전화통화는 물론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여전히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 썬앤문 대선자금 제공 의혹
소위 ‘썬앤문 게이트’로 불리는 썬앤문그룹 회장 문병욱 씨에 대한 의혹은 이 그룹의 부회장이었던 김성래 씨의 폭로에서 비롯됐다. 2003년 4월 문 씨의 사기혐의 고소로 구속된 김 씨가 “문 회장이 동두천시장에게 3억 원의 금품을 제공했다”고 폭로하면서 문 씨 역시 구속됐다. 이후에도 김 씨는 썬앤문그룹의 감세 특혜 의혹, 노 대통령 측에 대한 금품 제공 의혹 등을 잇따라 터뜨렸다.
특히 김 씨의 녹취록에 문 씨가 노 대통령 측에 95억 원을 전달한 정황이 담긴 것처럼 알려지자 야당은 이를 문제 삼았고, 이는 곧 특검 수사 대상이 됐다. 자존심이 상한 검찰은 특검 전에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 감세 청탁과 관련해 손영래 전 국세청장을 구속하고, 노 대통령 측근인 이광재 당시 국정상황실장, 여택수 청와대 행정관, 신상우 전 국회부의장 등이 문 씨에게 금품을 전달받은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95억 원 수수설은 끝내 밝혀내지 못했고 이후 특검팀 역시 “실체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문 씨에 대한 의혹이 노 대통령 측근비리로 연루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문 씨는 부산상고 57회 출신으로 노 대통령의 4년 후배다. 서울 강북에서 작은 호텔업을 하던 이 무명의 사업가는 이후 강남의 유명 호텔과 양평의 골프장 등을 인수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2년 대선 이후 그는 주변에 노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고 다녔다는 후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노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광재 의원 등이 그로부터 대선 직전 모두 1억 5500만 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검찰 조사에서 밝혀졌기 때문이다.
문 씨의 로비 의혹은 최근 다시 불거지고 있다. 옥중에 있는 김성래 씨가 끊임없이 문 씨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수감 중인 김 씨는 지난해 5월 검찰에 “2003년 2월 문 회장이 관리하던 차명계좌에서 비자금 60억 원이 빠져나갔다”고 진정했다. 그러면서 그는 문 회장의 차명계좌라고 주장하는 한 통장의 입출금 내역 기록 복사본을 증거자료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는 “특검팀에서 계좌추적을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다가 결국 계좌추적이 좌절된 바로 그 문제의 통장”이라며 “이 돈의 일부는 정치권 실세에게, 일부는 농협 측에 전달됐다”고 주장했다. 곧이어 이 차명계좌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서 “내 계좌의 60억 주인은 문 회장이 맞다”고 밝혀 김 씨의 폭로를 뒷받침하기도 했다.
그러나 썬앤문 측은 “이 계좌는 문 회장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김 부회장이 사용한 것이며, 문 회장과 썬앤문이 농협 불법대출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명났는데 굳이 농협에 60억 원을 줄 이유가 없다”고 반박했다. 차명계좌의 실제 주인이 문 씨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썬앤문과 문 씨에 관련된 의혹은 여러 줄기로 갈라져 있지만 핵심 의혹은 검찰 수사로 밝혀진 1억 5500만 원 이외의 추가 금품 제공이 더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문 씨의 비자금 형성 가능성과 농협 불법 대출 및 감세 특혜 의혹과도 연계되는 부분이다.
김 씨의 주장대로 특검 수사 당시 이우승 특검보의 돌발 사퇴 파동으로 ‘문제’의 통장에 대한 계좌추적이 무산된 것이 맞다면 결국 검찰 수사에 이어 특검 수사도 부실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 된다. 따라서 문 씨와 김 씨 등을 통해 차명계좌의 실체를 명확히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아직 이에 대한 검찰의 수사 결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한편 검찰은 문 씨와 썬앤문의 횡령 및 탈세 의혹에 대해 고소인 측의 소 취하 여부와 상관없이 지속적인 수사를 벌이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지난 3월 12일에는 문 씨의 20억 탈세 의혹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 김성래 씨(왼쪽)와 문병욱 씨 | ||
‘양길승 몰카’ 의혹은 2003년 8월에 처음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당시 청와대 제1부속실장이었던 양길승 씨가 2003년 6월 28일 청주에 내려가서 지역의 사업가인 이원호 씨 소유의 K 나이트클럽에서 향응접대를 받는 모습이 몰래카메라로 촬영된 장면이 공개된 것. 이 장면은 당시 이 씨의 혐의를 수사하던 청주지검의 김도훈 전 검사 등의 요청에 의해 경기도 일산 소재 한 민간조사기관이 촬영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씨는 청주에서 호텔과 나이트클럽 등을 운영하는 사업가로 살인교사 및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청주지검의 수사를 받고 있었다. 당시 담당검사가 김 전 검사다. 이 씨는 수사 무마 청탁을 위해 노 대통령의 최측근인 양 씨를 청주에 불러 자신의 업소에서 향응 접대를 했다.
몰카 파문으로 검찰은 뒤늦게 이 씨에 대한 조사를 본격화했다. 이 과정에서 대선 직전과 직후, 그리고 양 씨가 청주에 내려오기 직전 등 세 차례에 걸쳐 각각 50억 원과 45억, 3억 4000만 원 등의 뭉칫돈이 움직인 흔적이 그의 계좌에서 발견됐다. 야당은 이 씨가 수사무마 청탁 목적으로 노 대통령 측에 금품을 전달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특검은 “이 씨가 양 씨에게 향응을 제공하며 수사 무마 청탁을 한 것은 정황상 인정되지만 금품 제공은 밝혀진 게 없다. 수억 원대의 이동 역시 현금 인출이 아니라 수표거래 혹은 계좌이체였을 뿐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의 검찰과 특검 수사 역시 미진한 점이 남기는 마찬가지다. 모든 사건의 최초 발단이 되었던 핵심은 이 씨의 살인교사 혐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는 수사가 어물쩡 넘어갔던 것. 당시 특검에서도 이 부분을 수사했으나 “살인을 직접 지시했다는 폭력조직 두목 김 아무개 씨를 잡아야 조사할 수 있는데 그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며 사실상 수사를 제대로 못했음을 인정했다. 특히 이 씨는 살인범들에게 금품을 제공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 씨는 당시 검찰 조사에서 “돈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조폭들의 협박에 할 수 없이 준 것”이라고 해명했다.
수사 전문가들은 “이 사건의 경우 이 씨의 혐의를 먼저 명확하게 밝혀 낸 뒤에 이를 무기로 이 씨를 압박해야 로비 사실을 밝혀낼 수 있음에도 검찰이나 특검은 그 기본적인 사실을 밝히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주요 혐의자인 이 씨를 전혀 압박할 근거가 없었다”고 수사 실패의 원인을 분석했다. 이 씨의 살인교사 의혹의 공소시효는 이미 2004년 5월 만료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는 수사 시기도 놓친 셈이다.
당시 이 씨의 살인교사 혐의를 확신하고 강력한 수사를 펼쳤던 김 전 검사는 결국 몰카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지나친 수사 의욕이 화를 불렀고 결국 사건 실체를 밝히는 데도 실패했다. 그는 현재 변호사 개업도 할 수 없는 처지로 출소 후 서울 강남의 한 기업에서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검사는 “그때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말자”며 기자의 인터뷰 제의를 거절했다.
양 씨는 현재 호남대학교 관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최근 <왜 광주는 노무현을 선택했는가>라는 책을 냈다. 지난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을 담고 있는 책이다. “책에는 몰카 파문에 대한 내용이 일절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시 의혹에 대해 해명할 것이 없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양 씨는 “당시 파문은 특검에서 무혐의 처리가 됐고, 또 청와대에 사표를 낸 것으로 불미스런 일에 연루된 책임은 졌다고 생각한다”며 “당시의 일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지금은 아니며 향후 그럴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말을 아꼈다.
한편 이 씨는 몰카 파문의 초점이 됐던 K 나이트클럽을 최근 매각 처분한 것으로 밝혀졌다. 청주지역 최대 규모의 이 클럽은 몰카 파문 이후 오히려 유명세를 타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는 여전히 청주에 사업 기반을 두고 있으나 외부 활동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