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놓고 ‘상’ 먹는 청탁대전
▲ 경찰이 발표한 지난해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청탁을 통해 입상한 문인화 작품들. | ||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지난 5월 16일 업무방해 및 배임증재 등의 혐의로 한국미술협회 전 이사장 하 아무개 씨(54), 현 이사장 노 아무개 씨(57) 등 9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하고 조 아무개 씨(60) 등 심사위원, 협회 간부, 청탁 화가 등 총 11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미술협회 이사장, 심사위원 등 상당수 간부들이 적게는 수백만 원에서 많게는 수천만 원씩의 뇌물을 받고 당선작을 미리 짜고 선정했으며 중견 작가가 돈을 받고 출품작을 대신 그려주는 등 그 병폐가 극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4월에 열린 미술대전 문인화 부문 심사 직전에는 심사위원장을 위시한 심사위원 8명이 서울 서초동의 한 모텔에서 합숙까지 해가며 청탁받은 작품들을 달달 외웠다고 한다. 이러한 노력(?) 덕분일까. 지난 미술대전 문인화 분과의 입상작 중 95%가 돈을 받고 미리 뽑아놓은 작품이라는 게 경찰 관계자의 얘기다. 돈에 팔린 미술대전, 그 요지경 속으로 들어가보자.
오랜 역사와 규모를 자랑하는 미술대전은 비록 국전 시절만큼은 아니지만 1등 수상자에게는 대통령상이 주어지고 병역면제 혜택까지 있기 때문에 무명 화가나 지방 화가들 사이에선 여전히 유용한 등용문으로 통한다. 미술대전을 주관하는 한국미술협회(미술협회)는 전국적으로 137개 지부, 2만 4000여 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미술계 최대 단체. 하지만 미술협회 안팎에선 그동안 미술대전, 이사장 선거 등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내부 비리가 적발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만 이미 몇 차례 금품수수, 국고 지원금 횡령 등의 혐의로 수십 명이 입건되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한 번에 100명이 넘게 적발되기는 처음이다. 몇 차례 창피를 당하고도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은 비리 때문에 미술대전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앞에 내걸고는 있지만 언론사, 민간단체 등에서 주관하는 각종 공모전보다도 공신력이 떨어진 상태다. 소신 있는 미대 교수들 사이에선 제자들이 미술대전에 작품을 내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가 흐를 정도였다.
이번 경찰 수사의 단초는 방송이 제공했다. 올해 초 모 방송사가 미술대전과 관련한 비리 의혹을 추적 보도한 적이 있었다. 1차 심사 낙선작을 심사위원장 권한으로 특선으로 둔갑시키는가 하면 당선을 위해 돈거래를 한다는 화가들의 진술은 예술을 숭상하는 일반인, 미술애호가들에겐 충격 그 자체였다.
한편 이 방송을 본 시청자 중에는 경찰청 특수수사과 관계자들도 있었다. 예술마저 돈의 논리에 지배당하는 실태를 인지한 경찰은 즉시 수사에 착수했다. 마침 관련자의 제보도 들어왔다. 경찰은 수사에 들어간 지 열흘 만에 계좌추적 등을 통해 뇌물 거래 정황 등을 밝혀내고 6명을 불구속 입건하는 ‘작은’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계속해서 집중 수사를 펼쳐온 끝에 지난 5월 16일 미술대전 비리와 관련된 112명을 적발해내기에 이르렀다.
경찰 수사 결과 지난해 열린 제25회 미술대전은 특히 문인화 부문에서 문제가 많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문인화 부문에서만 총 2000여 점의 작품이 출품됐는데 1차 심사에서 선정된 입선작 391점과 2차 심사에서 선정된 특선작 113점은 상당수가 돈에 의해 ‘짜고 뽑은’ 작품이었던 것. 해당 심사위원들은 출품작의 15%만 입상시켜야 하는 운영 규정도 무시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 관계자는 “그동안 미술계에선 미술대전 입선은 350만∼500만 원, 특선은 1500만 원, 대통령상은 3000만 원 이상이 필요하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떠돌았다. 심사위원, 집행위원들이 비율을 나눠서 자기네 쪽 사람들을 골고루 당선시켜왔다”면서 “이번 수사로 문인화 부문에 당선된 작품 중 95%가 검은돈 청탁에 의한 것임이 밝혀졌다”고 말했다.
한두 작품도 아니고 수백 점에 달하는 작품을 어떻게 미리 짜고 뽑을 수 있었을까. 알고보니 문인화분과위원장 김 아무개 씨의 주도로 심사위원 8명이 지난해 4월 19일부터 4박 5일 동안 모텔에서 합숙까지 해가며 사진을 보고 작품을 꼼꼼히 외웠다고 한다. 출품작을 찍은 사진에는 각기 번호가 적혀 있었는데 빠른 번호는 특선, 뒷 번호는 입선 등으로 구분했다고 한다. 심사위원들은 화단의 같은 파벌, 제자, 지인 등에게서 청탁의 대가로 모두 5600여 만 원을 받아 챙겼다. 한편 청탁을 부탁한 사람들은 주로 30~50대의 무명 화가, 화가지망생들로 그중에는 가정주부, 미술학원 원장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경찰에 따르면 협회의 수장인 이사장조차 청탁을 받고 압력을 행사해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전 이사장인 하 씨는 지난해 4월 28일 한국화 부문 심사 직전 후배로부터 1000만 원을 받고 심사위원들에게 작품 사진을 보여주며 특선으로 뽑을 것을 종용했다. 그는 또 같은 해 11월 미술대전 수채화 부문에서 아무개 씨의 출품작이 1차 심사에서 낙선되자 심사위원장에게 “이사장 임기 내의 마지막 부탁이니 꼭 특선을 시켜 달라”고 부탁해 특선에 입상시키기도 했다.
미술협회는 전국적인 조직인 데다 이사장은 정부가 연 1억 원가량을 지원하는 미술대전 운영 및 심사위원 임명 권한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일단 이사장이 되면 3년 임기 동안 상당한 ‘권력’을 행사한다는 게 경찰 관계자의 얘기. 이는 미술협회에서 이사장 선거 때마다 과열경쟁이 빚어지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번 경찰 수사를 통해 기성 작가가 출품 작품을 대신 그려준 사례들도 적발됐다. 중견 작가 아무개 씨는 지난해 4월 출품을 준비 중이던 제자 3명에게 각각 350만 원씩을 받고 미술대전 공모작을 대신 그려줬다. 그런가 하면 1500만 원을 들여 중견 작가에게 작품을 의뢰, 미술대전에 출품했지만 수차례에 걸쳐 낙선하자 지병이 악화돼 결국 세상을 등진 사례까지 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무명화가 윤 아무개 씨(54)는 2005년 11월 중견작가 유 아무개 씨(65)로부터 “미술대전 특선에 입상하도록 작품을 대신 그려 줄 테니 특선 경력을 이용해 미술학원이라도 운영해보라”는 말을 듣고 단칸방 전세보증금 1500만 원을 빼 유 씨에게 건넸다. 그러나 유 씨가 대신 그려준 작품은 1차 입선도 통과하지 못했고 돈을 돌려달라는 윤 씨의 요구에 유 씨는 두 개의 작품을 더 그려 지난 4월 다시 출품했지만 또 다시 낙선하고 말았다. 빚까지 얻어 겨우겨우 생활해오던 윤 씨는 결국 화병으로 술독에 빠져 살다 지난 2월 지병인 간경화로 사망했다고 한다.
미술대전 입상 경력이 대체 뭐기에 이렇게까지 잡음이 끊이지 않는 걸까. 무엇보다도 입상 경력이 많으면 곧 인기 작가가 될 것이라는 출품자들의 그릇된 인식과 이를 악용한 협회 관계자들의 욕심 탓이 크다. 또한 미술협회 ‘초대작가’가 되기만 하면 작품 전시 등의 기회가 늘어나는 것뿐 아니라 향후 자신의 그림 값도 높아질 것이라는 허황된 기대심리도 여기에 한몫했다. 미술협회 초대작가가 되려면 수상 등 작품 활동으로 ‘10점’의 점수가 쌓여야 하는데 미술대전 입선은 1점, 특선은 3점 등으로 점수가 주어지기 때문에 몇 번씩이라도 미술대전에 입상하기 위해 ‘예술가로서의 자존심’마저 팔게 됐던 것이다.
미술대전과 관련한 비리로 세상이 또 한 번 떠들썩해지자 미술계에서는 이미 공신력을 잃은 일부 협회의 문제가 전체로 확대 해석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익명을 원한 미술대전 특선 출신의 한 화가는 “정정당당하게 뽑힌 사람으로서 이런 문제가 생길 때마다 화가 난다. 자존심을 팔아가면서까지 상을 받으려는 이유를 모르겠다”면서 “공모전에서 특선을 많이 하면 현대미술관 초대작가로 인정받는 등 좋은 점이 있었지만 이러한 제도도 이미 사실상 없어졌고 상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금방 유명해지리라는 건 착각일 뿐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 사과의 썩은 한 부분만 보고 전체를 매도하진 않았으면 한다”고 토로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비리로 얼룩진 미술대전은 더 이상 신인 등용문으로서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주장도 많다. 중앙대 한국화학과 김선두 교수는 “나 역시 미술대전에서 특선을 받았지만 이 기회에 미술대전이 아예 없어지고 미술협회도 친목단체 정도로만 남았으면 한다”면서 “미술대전은 공신력을 잃은 지 오래라 제자들에게도 추천하지 않는다. 실력 있는 소수의 심사위원이 명예를 걸고 참신한 작품을 뽑는 게 도리인데 미술대전에서 받은 상은 돈 주고 받은 상이라는 소문이 돌아 화단에서도 인정받지 못한다. 실력과 뜻이 있는 젊은 신인들이라면 각종 재단, 문화 기업 등에서 주관하는 공모전, 전시전 등을 통해 재능을 제대로 펼쳐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번 사건이 활황을 맞은 국내 미술품시장에 찬물을 끼얹지는 않을까 하는 화랑가 일부의 우려에 대해 인사동 통인화랑 이계선 대표는 “눈에 띄는 변화는 없다. 하지만 미술애호가들 사이에 국내 화단에 대한 인식이 점점 나빠진다면 결국 외국 작가의 작품으로 관심이 쏠리게 될 것이고 그 피해는 참신한 국내 작가들에게 돌아갈 것이다”고 경고했다.
문화관광부는 그동안 문예진흥위원회를 통해 매년 미술대전 운영 자금 1억 원가량을 지원해왔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올해 미술대전에 지원하기로 한 예산(6800만 원)에 대해선 경찰 최종 수사 결과에 따라 궤도를 수정하겠다는 입장이다. 문광부 예술정책팀 관계자는 “논의 끝에 올해 미술대전에선 문화관광부 장관상을 수여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문인화 외에도 더 규모가 큰 서양화, 한국화 등 전체 분과에 대한 확대 수사를 펼치고 있지만 아직 추정 단계일 뿐 구체적인 혐의를 밝혀내진 못하고 있다”며 “그릇된 관행을 바로잡고 예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선 관계자들의 자정 노력과 솔직한 제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장유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