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잡음의 중심엔 그가 있다
홍기택 산은지주 회장이 금융권을 넘어 재계에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국내 증권업계 선두를 다투는 KDB대우증권은 요즘 선장이 없는 상태로 항해하는 어지러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임기를 8개월이나 남겨둔 김기범 전 사장이 갑자기 사표를 던지면서 새로운 CEO(최고경영자)를 물색 중인데, 공모 절차도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특정 인사 내정설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대우증권은 추석연휴가 지난 뒤인 9월 15일 이사회를 열고 사장 후보자를 정할 방침이었다. 그 전엔 후보군조차 추려내지 않았다는 얘기다. 하지만 증권가에서는 추석 전부터 이미 대우증권 고위임원 출신 인사 A 씨가 사장에 내정됐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A 씨의 내정에는 특히 대주주인 산은지주(산업은행 금융지주사) 홍기택 회장의 의중이 반영됐다는 분석이 흘러나왔다. 홍기택 회장은 대우증권 민영화 등을 위해 정부 측과 원활히 소통할 수 있는 인사를 원했고, A 씨를 적임자로 꼽았다는 후문이다.
산은지주가 대우증권의 대주주이고, 홍기택 회장이 수장이라는 점에 비춰보면 사실 계열사 수장 인사에 홍 회장의 의중이 반영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증권가에서 뒷말이 무성한 이유는 김기범 전 사장의 퇴진과정이 매끄럽지 않았기 때문.
지난 7월 말 갑작스럽게 사퇴한 김 전 사장은 퇴진 이유로 ‘일신상의 사유’를 내세웠지만 증권가는 이를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임기가 많이 남아있는 데다, 대주주와의 갈등설이 꾸준히 흘러나온 탓이다. 산은지주와 대우증권 측은 이 같은 논란에 대해 “공모절차도 시작되지 않은 상황에서 특정인물이 내정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홍 회장의 인사 개입설은 대우증권 이전에도 있었다. 같은 국책은행인 IBK기업은행 자회사 CEO 인사에 난데없이 산은지주 회장의 외압설이 등장한 것. IBK자산운용 대표로 권선주 기업은행장이 추천한 내부인사가 홍 회장이 추천한 외부인사에 밀려 인선이 늦어지고 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기업은행 측은 “법에서 정한 절차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인사검증이 늦어지고 있을 뿐”이라며 부인했지만 금융권을 한바탕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홍기택 회장의 영향력은 금융권을 넘어 기업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기본적으로 산업은행은 채권단 자격으로 기업들의 구조조정에 참여한다. 최근에도 현대그룹, 한진그룹, 동부그룹 STX그룹 등 굵직굵직한 대기업 구조조정에 관여했다.
최근 금융권에서는 구조조정이 한창인 동부그룹 자구책 마련 과정에서 산업은행이 숨겨진 ‘야심’을 드러냈다는 풍문이 들리고 있다. 산업은행이 동부그룹 핵심 계열사인 동부화재 경영권을 갖기 위해 그룹 대주주 측에 주식담보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 산업은행은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의 장남인 김남호 씨가 소유한 동부화재 주식을 담보로 내놓을 것을 요구해 그룹 측과 마찰을 빚은 바 있는데, 단순히 채권확보를 위한 조치가 아닐 수 있다는 시각이다.
산업은행은 계열사 매각이 여의치 않자 “추가자금 지원을 위해서는 대주주의 자구노력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내세워 남호 씨의 동부화재 주식을 담보로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이런 일련의 과정이 잘 짜인 시나리오일 수 있다는 음모론이 나오는 중이다. 산업은행이 계열사인 KDB생명보험을 매각하는 대신 손해보험업계 3~4위를 다투는 동부화재 경영권을 원하고 있다는 얘기다.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한 동양그룹과 관련해서도 심상치 않은 조짐이 보이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산업은행 임직원 3~4명이 동양그룹에서 수억 원대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검찰은 동양그룹 측이 카드 매출을 허위로 부풀린 후 현금을 마련하는 ‘카드깡’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산업은행 임직원에게 전달한 것으로 보고 사실 관계를 확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최근 동양그룹 임직원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금품 조성 방식과 자금 사용 경로, 전달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검찰은 동양그룹 임직원의 ‘비자금 조성 혐의’와 산업은행 임직원의 금품수수 혐의를 동시에 조사하고 있다.
만약 검찰의 수사결과 이런 과정이 사실로 확인되면 산업은행이 조직적으로 돈을 받고 구조조정 대상 기업의 뒤를 봐준 셈이 돼 상당한 파장이 일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동양그룹 사태는 사기성 기업어음(CP)을 발행해 수만 명의 피해자를 발생시킨 사안이어서 도덕성 논란도 피하기 힘들 전망이다.
산업은행이 난데없이 세계 최대의 ‘조선그룹’을 추진하려 한다는 관측도 눈길을 끌었다. 산업은행은 자회사로 편입된 STX조선해양과 수출입은행이 관리중인 중견 조선사 성동조선해양의 합병을 검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STX조선과 성동조선해양이 합병할 경우 세계 4위 규모의 조선사가 되는데, 여기에 산업은행의 관리를 받고 있는 세계 2위 조선사 대우조선해양을 더하면 현대중공업을 제치고 세계 1위 조선그룹이 된다는 것이다.
지난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금융 4대천황’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산은지주 회장직은 이렇듯 이번 정부 들어서도 각종 소문의 진원지가 되고 있다. 강력한 권한과 무거운 책임만큼 많은 구설수가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