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드마크 조성 꿈… “아낌없이 쓰련다”
현대차그룹의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부지(약 7만 9342㎡) 낙찰가에 재계와 증권가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 감정가보다 무려 3배 이상 높은 가격이며 시장 평가·예상액보다 2배 이상 많다. 3.3(약 1평)㎡당 약 4억 4000만 원에 사는 꼴이며 지난 10년간 공시지가 1위를 차지했던 서울 명동의 한 부지보다 3.3㎡당 1억 9000만여 원이나 비싸게 산 셈이다. 현대차 측은 “100년을 내다보고 결정한 일” “통큰 결단”이라며 충격을 완화시키고 있지만 ‘정몽구 회장의 집착’, ‘한국형 제왕적 오너 경영의 폐해’라는 진단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정몽구 회장의 놀라운 베팅 속사정을 들여다봤다.
현대자동차 사옥 전경과 정몽구 회장 캐리커처.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지난 9월 18일 오전 10시. 현대차그룹이 서울의 마지막 남은 노른자위 땅으로 알려져 있는 삼성동 한전 부지를 낙찰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삼성그룹이 전날 마감시한 직전 입찰에 참여함으로써 한전 부지 경쟁은 시장의 예상대로 삼성과 현대차의 2파전이 됐고, 현대차가 승리함으로써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뚝심이 조명받았다. 반면 인수·합병(M&A)에서 져본 적이 거의 없는 삼성에는 이건희 회장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잠시 후, 현대차그룹의 낙찰 가격이 알려지면서 현대차와 정몽구 회장에게 향했던 박수소리는 일제히 멈췄다. 대신 우려의 시선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제아무리 정몽구 회장의 통 큰 결단이니, 숙원사업이었다느니 해도 매입 가격이 지나치다는 평가와 그 부작용에 대한 걱정을 잠재우기는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 세 계열사가 컨소시엄을 이뤄 입찰에 참여한 현대차그룹의 최종 입찰 가격은 10조 5500억 원으로 밝혀진 까닭에서다. 감정가 3조 3000억 원보다 3배 이상 비쌀 뿐 아니라 낙찰가가 4조 5000억~5조 원일 것이라는 시장 예상가보다도 2배 이상 높은 가격이다.
증권가에서는 일제히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냈다. 재계도 ‘깜짝 놀랄 일’로 받아들였다. 입찰가가 5조 원이 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삼성 측도 현대차의 입찰가를 듣고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며 크게 놀랐다는 후문이다. 심지어 현대차 내부에서조차 당혹스러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현대차는 부랴부랴 진화에 나섰다. 현대차 측은 “한전 부지에 현대차그룹의 제2 도약을 상징하는 글로벌 비즈니스센터를 건립하겠다”며 “현대차그룹의 글로벌 비즈니스센터는 100년 앞을 내다본 글로벌 컨트롤타워로서 그룹 미래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차 관계자는 “수익을 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룹의 미래를 짓기 위해 매입했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부정적인 시선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이번 결정이 정몽구 회장에서 비롯한 것이니만큼 우리나라 재벌의 황제경영에 대한 비판과 거수기 이사회에 대한 회의론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현대차 등 3사는 입찰 마감날인 지난 17일 오전 이사회를 열고 입찰 참여를 결정했다. 감정가의 3배, 주변 시세보다 2배 이상의 금액으로 입찰에 참여할 것을 결정하면서 이사회의 반대는 없었다. 정몽구 회장의 결정으로 이미 상황은 종료됐으며 이사회 개최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다는 의미다.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랜드마크를 만들어보고 싶은 정몽구 회장의 욕심”에서 입찰가가 결정됐다며 “‘금액 상관하지 말고 무조건 사야 된다’고 하는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의사결정의 결과물”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듯하다. 한 기업 전문 변호사는 “미국에서는 M&A 등 딜을 하기 전에 그 가격이 적절한지 조사하는 ‘페어니스 오피니언(Fairness Opinion)’ 과정과 이사회 결의를 거친다. 이번처럼 최고경영자의 독단적인 결정이 여타 입찰가와 현저한 차이가 나서 주주 가치를 훼손한 경우 배임에 해당한다”며 “이번 입찰 가격이 후계구도를 감안했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더더욱 그렇다”고 지적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현대차, 고액 베팅 설설설 계산이냐 오버냐 현대차그룹이 누구도 예상치 못한 거액을 베팅해 한전 부지를 낙찰받자 재계는 ‘설왕설래’로 부산했다. 그만큼 ‘쇼킹’했다는 얘기다. 호사가들 사이에서 회자된 몇 가지 설들을 정리했다. 설#1. 현대차가 삼성의 거짓 정보에 당했다? 입찰 마감 직전까지 삼성이 입찰 참여 여부를 밝히지 않자 현대차는 애가 탔고 삼성의 참여 여부와 참여한다면 입찰가를 얼마 쓰는지 정보를 얻기 위해 분주했다는 얘기다. 마감 직전 삼성은 9조 원대에 입찰 참여 정보를 흘렸고 정몽구 현대차 회장은 삼성이 9조 5000억 원에 뛰어들 것이라는 보고를 받은 뒤 1조 원을 더 얹어 입찰하라고 지시했다는 설이다. 그러나 현대차 관계자는 “한전 부지는 진작부터 매입하기로 결정된 것으로서 그런 정보에 휘둘릴 이유가 없다”며 “삼성이 얼마를 써냈는지도 모르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삼성은 실제 5조 원에 못 미치는 입찰가를 써냈고 현대차가 한전 부지를 고가 매입한 덕에 인근 한국감정원 부지(1만 988㎡) 가격이 치솟을 것으로 예상돼 오히려 득을 봤다는 평가도 있다. 삼성생명은 지난 2011년 한국감정원 부지를 3.3㎡(약 1평)당 7000만 원이 안 되는 가격에 매입했다. 삼성 관계자는 “한국감정원 부지가 있기에 한전 부지가 현대차만큼 절실하지는 않았다”면서 “적정 수준의 입찰가를 써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설#2. 고액 베팅은 정몽구 회장의 노림수? 현대차의 고액 베팅에는 정몽구 회장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는 설이다. 우선 진작부터 인수 의지를 강하게 피력해온 만큼 반드시 인수하겠다는 결단을 보여주었고, 143%에 달하는 공기업 한전의 부채비율을 20%가량 낮추는 데 기여했으며 정부의 사내 유보금 과세를 상당 부분 피할 수도 있게 됐다. 또 저탄소법안 등 자동차업체로서 한전의 최대주주인 산업통상자원부와 얽혀 있는 점이 많아 최대한 베팅해 산업부를 비롯한 정부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작용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현대차를 비롯해 컨소시엄에 참여한 기아차, 현대모비스의 주가가 곤두박질치면서 후계 승계 작업이 미흡한 정의선 부회장의 지분 승계와 현대차그룹의 지주사 체제 전환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계산도 작용했다는 설도 보태졌다.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는 순환출자 구조를 띠고 있는 현대차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적인 계열사들이다. 이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인수가 절실했고 한전의 부채비율을 낮추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머지는 억측”이라고 부인했다. [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