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낸 사람 풀어줘서 불 끄겠다고?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두 장관이 조건을 달기는 했지만, 입을 맞춘 듯이 발언한 것을 보면 기업인 사면에 대한 정부 내 검토가 상당히 진행돼왔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정부 관계자들을 접촉하는 대관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상당한 근거도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또 다른 단체 관계자는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가 ‘황 장관까지 나서 감옥의 재벌 회장을 사면하려는 로비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는데, 사실 총수들이 유고 상태인 대기업들은 줄곧 사면 가능성을 타진해오지 않았겠느냐”면서 “최근 정부의 기업투자 주문에 기업들이 적극적인 의사를 표시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실제로 지난 18일 박 대통령의 핵심 국정기조인 창조경제 활성화에 다시 붙을 붙이기 위해 실행에 들어간 17개 시·도 창조경제혁신센터 구축에는 15개 지역연고 대기업들이 참여하고 있다. 사전조율 과정에서 정부와 대기업들 간 ‘상당한 거래’가 있었을 것이란 소문이 많았다. 이 사업에는 삼성그룹을 필두로 현대차, SK, LG, 롯데, GS, 포스코, 한진, 한화, KT 등 주요 대기업들이 대부분 참여하고 있다.
구본상-구자원 LIG그룹 부자와 김호진-김선애 태광그룹 모자(왼쪽부터)는 가족끼리 함께 구속됐다.
특히 첫 모델로 공개된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삼성그룹)만 해도 ‘정황’이 엿보인다. 삼성그룹은 혁신센터 지원에 그치지 않고 옛 제일모직 부지에 300억 원을 들여 창조경제단지를 조성하는 계획까지 내놓았다. 이는 1주일이 지난 9월 24일 방송통신위원회가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과 관련, 이통사·제조사가 소비자에게 지급하는 단말기 보조금을 각각 구분해 공시하는 ‘분리공시’를 제외하기로 확정한 것을 두고 “삼성의 입김이 통했다”는 뒷말이 나오는 배경이 됐다. 분리공시제는 “영업비밀이 공개될 우려가 있다”며 삼성전자만 반대해온 제도로, 그동안 “삼성이 분리공시제 무산을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다”는 이야기가 무성했다.
결국 이번 기업인 사면설도 정부 측의 ‘적극 투자’ 요구와, 기업들의 ‘민원 해결’의 이해가 서로 맞아떨어지는 지점에서 불거졌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박 대통령이 ‘올인’하고 있는 경기회복을 위해선 대기업들의 협조가 절대적인 데다, 임기 2년차가 지나 집권 중반기에 가까울수록 내치의 성과를 내야하는 만큼 더 이상 재계와 불필요한 긴장전선을 형성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도 들어있는 것으로 재계는 파악하고 있다.
기업인 사면론에 대해 황 장관은 “정치인·기업인에 대한 특혜성 사면은 없다는 정부 기조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다만 불법 수익을 환원하고 일정 형기를 채우는 등 “가석방 요건을 충족한다면 다른 일반 수형자들과 똑같이 기회를 줄 수 있다”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이명박 정부 시절까지만 해도 유죄판결을 받은 기업인들은 대법원에서 사면 대상이 되는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정도의 형이 확정되고, 시간차를 둔 뒤 대통령 특별사면 조치를 받는 패턴을 보여 왔다. 하지만 경제민주화 바람이 거세지고, 재벌 특혜 시비를 엄정하게 바라보는 여론이 확산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비리나 부정에 휘말린 재벌 총수 등에 대해선 대통령의 특별사면권을 제한하겠다고 공약하기에 이르렀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비리 연루된 기업인 등에 대해 특별사면을 한 번도 단행하지 않았다.
재계에선 ‘구제 대상’으로 횡령 등의 혐의로 징역 4년을 선고받고 1년 8개월째 수감돼 있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신병 치료 때문에 구속집행정지 중인 이재현 CJ그룹 회장을 첫 손가락에 꼽고 있다. 최 회장과 이 회장은 모두 황 장관이 사면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 ‘부당한 이익의 사회 환원’이나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인으로 분류된다.
최태원 회장은 역대 구속된 대기업 회장 가운데 최장기간 구속 기록을 연일 경신하고 있는데, 현재 법률상 가석방 요건인 형기의 3분의 1을 넘긴 상태다. 지난 18일 항소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이재현 회장의 경우, 검찰과 이 회장의 변호인 측은 모두 항소심 결과에 상고한 상태여서 특별사면 대상이 되려면 상고를 취하하거나 조속히 대법원에서 형을 확정해야 한다.
최 회장은 이미 지난해 받은 보수 187억 원 전액을 사회적 기업 지원과 출소자 자활사업 등에 기부했고, 이 회장의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범삼성가는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낸 바 있다.
이들 외에도 사기 혐의로 실형을 확정받고 수감된 구본상 LIG 넥스원 부회장, 간 이식 수술을 위해 보석으로 풀려난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 기업비리 혐의로 재판중인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등도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기업인에 대한 가석방과 사면이 재계의 희망대로 흘러가지는 못할 것이란 관측도 만만치 않다. 정부와 대기업 간 유착을 야권에서 두고만 볼 리 만무한 데다, 기업인 사면 여부의 열쇠는 여론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