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 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 73
개화기인 1900~1910년경의 경대로 ‘통인가게’ 소장품이다. 당시 유리거울이 청동거울과 수정거울을 대신하게 되면서 경대의 보급이 늘어났다. 서울 관훈동의 ‘통인가게’는 1924년 설립돼 2대에 걸쳐 옛 공예품과 도자기를 전시·보존·판매해왔다. 또한 전통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도자작품과 공예작품을 소개해오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경대는 고려시대 경가(鏡架, 거울걸이)에서 발전했다고 한다. 고려 태조 때는 화장을 장려하고 화장법을 가르쳤다. 머리에는 동백기름을 윤기 있게 발랐다. 눈썹은 먹으로 초승달처럼 가늘게 그렸다. 뺨은 복숭앗빛으로, 입술은 앵두 빛으로 연지를 칠했다. 얼굴에는 분가루를 짙게 발라 피부가 창백하게 보이도록 했다. 화장하려면 거울은 필수품이었다.
1883년 판유리공장이 세워진 이후 유리거울이 등장했다. 유리거울이 청동 거울과 수정거울을 대신하게 됨으로써 경대의 보급이 늘어났다. 시집가는 새색시는 아무리 초라한 것이라도 경대 하나는 마련했다고 한다. 고단한 시집살이 속에서는 경대는 위로를 건네주는 ‘내 마음의 보석상자’였다. 1960년 <동아일보>(9월 26일자)는 한 여인이 얼마나 경대를 애지중지했던지 경대를 꺼내려고 불난 집에 뛰어들었다가 타죽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러나 판유리의 대량생산은 경대의 쇠퇴를 의미했다. 체경(體鏡: 온몸이 비치는 큰 거울)이 보급되면서 경대의 수요도 차츰 줄어들었다. 현대에 들어서 경대는 실용적인 의미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결혼을 앞둔 신부나 외국인에게 선물로 사용하며 그래서인지 자개를 박은 화려한 것들이 많다.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화장하는 여인>.
형태를 보자. 하단에 여닫이문이 있고 문을 열면 서랍이 서너 개 있는 작은 직육면체다. 뒤에는 거울이 부착되어 있어 뚜껑을 열어젖혀 비스듬히 세워 사용한다. 사용할 때는 거울을 세워 놓고, 화장이 끝났을 때는 접어 둔다. 주로 느티나무와 오래된 감나무를 사용해 만들었다. 나무에 생칠을 하여 나뭇결을 살린 것, 홍칠을 한 것, 자개를 박아 넣은 것, 화각(華角; 쇠뿔을 얇게 펴서 채색 그림을 그린 후 이를 목기물 위에 붙여 장식하는 한국 특유의 각질(角質)공예기법) 혹은 대모장식(玳瑁粧飾; 누런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는 열대지방의 거북의 등껍질을 사용한 공예기법)을 한 것 등이 있다.
문양은 주로 원앙, 십장생, 쌍학, 길상문(吉祥文)이 새겨져 있다. 금구장식으로는 불로초, 제비추리경첩의 놋쇠, 달형 앞바탕, 박쥐들쇠가 쓰였다. 모두 오복을 상징한다. 필수 혼수품이었으므로 복을 듬뿍 받고 싶은 염원을 담았다.
경대는 한때 집안의 보물이었다. 1930년대에는 도둑이 들어 경대를 가져갔다는 뉴스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당시에는 집안이 쪼들리면 경대를 내다 팔아 어려움을 이겨냈다. 두 살배기 아이를 버리고 집을 나가면서도 경대를 들고 갔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이제 경대는 가정집에서는 보기 힘들다. 서구의 화장대와 화장실의 거울이 경대와 경대문화를 모두 바꾸어놓았다. 온돌문화의 쇠락이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