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바꾸라는데 한 사람만 ‘NO!’
김기춘 비서실장 연내 교체 가능성에 대한 전망성 기사가 보도되자 청와대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기춘 실장. 연합뉴스
현장에 있던 한 기자는 “문제의 기사는 연말까지는 김 실장이 물러나게 될 것이라는 정국 전망성 기사였다. 이에 대해 일반 비서실 관계자가 아니라 기자들과 늘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대변인이 ‘오보’ 운운하며 ‘논평할 가치도 없다’는 식의 반응을 보인 것은 이례적이고, 적절치도 않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이 기자에게 “국회의원 한두 명이 마음대로 떠드는 걸 듣고 상황을 판단하지 말라”는 충고를 했다고 한다.
신경질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청와대의 반응과 달리 새누리당 관계자들이나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김 실장의 거취가 다시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데 수긍하는 분위기다. 우선은 청와대에 인사수석실까지 신설했는데도 ‘인사 참사’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은 청와대 인사위원장인 김 실장의 책임이 무겁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다. 특히 송광용 전 교육문화수석의 임명과 갑작스런 사퇴는 결코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새누리당의 한 고참 당직자는 “송 전 수석의 흠결은 대단치 않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임명되고 물러난 과정은 현 청와대 인사검증 시스템의 아킬레스건이 뭔지, 왜 그토록 많은 인사 참사가 발생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 송 전 수석이 청와대 인사검증팀에 거짓 답변을 한 지 이틀 만에 수석에 정식 내정된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라는 지적이었다.
이 당직자는 “무슨 급한 일이 있었길래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임명하면서 거짓말 여부를 검증할 만한 시간도 갖지 않는단 말이냐”고 반문하며 “여당 인사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VIP(대통령)가 찍어서 내려 보내는 인사에 대해서는 청와대의 누구도 노(No)라고 얘기하지 못하고, 그래서 인사 참사가 되풀이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들이 오갔었는데 송광용 사태는 이런 의혹이 사실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9월 박 대통령의 캐나다·미국 순방에 동행했던 한 기자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이 기자는 “순방을 떠나던 당일(9월 20일) 서울공항에서 대통령 전용기에 탑승한 뒤에야 송 전 수석이 물러난 사실을 전해들었다”며 “박 대통령의 UN 총회 연설 등 거의 1주일 동안 이어진 순방 기사에 송광용 사태가 묻힌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기자들 사이에서 ‘해외 순방이 김 실장을 살렸다’는 얘기가 오가기도 했다”고 전했다.
김 실장 스스로 물러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는 점 역시 그의 거취와 관련한 숱한 기사와 루머를 낳는 요인이다. 청와대는 공식적으로 확인해 준 적 없지만 김 실장이 박 대통령에게 이미 여러 차례 물러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는 것은 청와대 직원들 사이에서도 기정사실로 여겨지고 있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7월 10월 세월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기관보고에 참석한 모습.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한 청와대 관계자는 안대희·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와 정성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의 낙마 사태가 정리된 것과 김 실장의 취임 1년(8월 5일) 경과 등이 겹친 뒤로 미묘한 분위기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2기 내각이 출범하고 인사수석실 신설 등 청와대 체제도 안정이 되면서 김 실장이 스스로 자기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참모들 사이에서도 고령(1939년생)에 집안의 우환까지 겹친 김 실장에게 더 이상 무거운 짐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다”고 말했다.
세간에는 김 실장이 물러나는 쪽으로 뜻을 굳히고 청와대 수석과 비서관 등과 개별적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청와대 안팎에서 김 실장의 후임으로 현경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안병훈 기파랑 대표, 권영세 주중 대사 등의 실명까지 심심찮게 거론되고 있다는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 현경대 수석부의장과 안병훈 대표는 김 실장과 함께 박 대통령을 돕는다는 소위 ‘원로 7인회’ 멤버이기도 하다.
이제 임기 중반기인 3년차에 접어드는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에서도 김 실장과 계속 함께 가는 것과 교체하는 것을 놓고 차분하고 진지하게 계산을 해 봐야 하는 시기라는 분석도 있다. 김 실장의 보좌를 받는 것에서 오는 안정감과 인적 쇄신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강한 국정 개혁 동력과 국민 지지 등을 놓고 저울질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준석 전 ‘새누리당을 바꾸는 혁신위원회’ 위원장이 김 실장 교체설에 대해 “분위기를 일신해 보는 차원에서 나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낸 것도 이런 여론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새누리당 내에서 비박계로 분류되는 한 재선의원은 “박 대통령이 계속 김 실장의 손을 잡고 감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든든한 호위무사가 옆에 있다는 위안뿐인데, 걸핏하면 호위무사의 칼날에 주군이 베이는 형국”이라며 “임기 전체의 성패가 결정되는 시기를 맞은 박 대통령으로서도 전략적인 판단과 정국 구상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쯤 되면 김 실장 사퇴설에 대한 청와대의 신경질적인 반응을 단순한 ‘절대 부정’으로 치부하기 어려워진다. 오히려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라는 ‘유보’의 의미로 해석하는 게 맞다는 시각도 있다. 정기국회가 이제 정상화된 시점에 인사 문제를 공론화하는 것은 막 질주를 시작한 스프린터가 신발 끈을 고쳐 매는 것처럼 타이밍이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한국일보> 보도에 대해 청와대의 한 고참 행정관이 내놓은 평가는 이런 해석에 더 힘을 실어준다. 그는 “이제 막 10월로 접어든 시점에 ‘연말까지는 김 실장이 교체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마나한 소리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행정관은 김 실장의 거취 문제가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모른다는 것을 전제한 뒤 “설사 <한국일보> 보도대로 대통령이 연말쯤 비서실장 교체를 생각하고 있다 해도 그게 지금 공론화될 경우 남은 두 달을 말 그대로 김기춘 거취 논란으로 허송세월하게 될 것”이라며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가는 자리인 만큼 미리부터 인사 검증을 한다고 호들갑 떨 일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